■ 국립청주박물관 '송시열 특별전' 10배 즐기기

우암 송시열(1607~1689) 하면 완고한 보수주의자 이미지를 떠올리게 된다. 따라서 그 전시회도 "딱딱하고 재미없을 것"이라고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국립 청주박물관 청명관을 방문하면 '우암에 얽힌 에피소드'를 만날 수 있다.

▲ 50x152㎝의 대작으로, 우암은 명필로도 유명했다. 당시 송준길과 더불어 양송체로 불렸다. 국립 청주박물관(관장 민병훈)이 개관 20주년을 기념, 이달 말까지 우암 송시열 특별전을 계획하고 있다. 전시작품 90여점은 후손들이 기탁한 것으로, 이번에 처음 공개되는 것도 상당수에 달하고 있다. 이중 과거 답안지, 영초, '華陽' 친필 등이 우암의 새로운 면모를 보여주고 있어, 관람객들의 발길을 잡고 있다.우암은 어떤 이유에서 인지 과거에 뜻이 없었다. 그러다 생의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1633년(인조 1년) 생원시에 응시했다. 이때 출제된 문제는 주역 음양의 이치를 묻는 것으로, 우암은 이의 핵심만 뽑아 간결하게 작성했다.그러나 당시 시험관은 답안지가 규격에 맞지 않는다는 이유로 우암의 일이름을 합격자 명단에서 제외하려 했다. 이때 수석 시험관이었던 최명길(1586∼1647)이 "이시람은 장차 명세대유가 될 사람이다. 평범한 사람으로 보아서는 안 될 것이다."라는 말과 함께 우암을 장원 급제시켰다.그러나 아이러니컬하게도 양묘호란 후 두사람은 화친파와 반청파로 갈라서면서 정치적으로 서로 다른 길을 걷게 된다. 평범해 보이는 우암의 답안지는 그런 뒷 얘기를 담고 있다.많은 사람들이 조선시대 영정은 단번에 그려진 것으로 알고 있으나 그렇지 않다. 완성된 그림을 그리기 전에 '영초'로 불리는 밑그림을 그렸다. 영초는 인물의 특징이나 채색효과를 미리 알아보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 조선시대 영정은 밑그림 영초를 통해 예비적으로 그려진 후 최종적으로 완성됐다. 김진규가 그린 우암의 영초.
이번 특별전을 찾으면 김진규(1658~1716)가 그린 것으로 알려진 우암의 영초를 만날 수 있다. 이와 관련, 일화가 전해지고 있다. 평소 우암은 안채(眼彩)가 강하여 눈을 크게 뜨는 일이 없었다고 한다.

어느날 김진규가 이 영초를 그리려고 당(堂)에 오르자, 송시열이 기쁜 마음으로 반기며 모처럼 눈을 크게 떴고 김진규는 이 때의 우암 표정을 재빠르게 담은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그러나 우암은 매우 검소했기 때문에 그의 문인들이 십시일반으로 영정 재원을 마련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조선시대에는 유학자가 배워야 할 기초학문을 '격물'(格物)이라고 불렀다. 이 격물에는 천문학도 포함돼 있다. 우암의 유품 가운데 화양동에서 사용했던 혼천의가 있다. 이 혼천의는 그 기준이 북위 37도에 맞추어져 있다. 화양구곡 제 5곡인 첨성대 위치도 37도다.

우암의 친필 가운데는 '華陽'이란 글자가 있다. 이 글자는 中華의 '華'와 '一陽來復'(양의 기운이 다시 찾아온다)의 陽에서 그 의미를 취한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이를 중국에 대한 사대주의 사고로 생각하고 있다.

그러나 글자 '華陽'은 사대사상과 거리가 멀다. 우암은 당시 사회질서의 가치를 문화에서 찾았고, 그 연장선에서 명나라는 문명국, 청나라는 오랑캐 국가로 생각했다.

그런 명나라가 오랑캐국에 의해 멸망하자 유일하게 남은 동북아 문명국가는 '조선'이라고 생각했다. 즉 명나라는 대중화, 조선은 소중화로 인식했다. 바로 화양은 소중화를 상징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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