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국립청주박물관 '송시열 특별전' 10배 즐기기
어느날 김진규가 이 영초를 그리려고 당(堂)에 오르자, 송시열이 기쁜 마음으로 반기며 모처럼 눈을 크게 떴고 김진규는 이 때의 우암 표정을 재빠르게 담은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그러나 우암은 매우 검소했기 때문에 그의 문인들이 십시일반으로 영정 재원을 마련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조선시대에는 유학자가 배워야 할 기초학문을 '격물'(格物)이라고 불렀다. 이 격물에는 천문학도 포함돼 있다. 우암의 유품 가운데 화양동에서 사용했던 혼천의가 있다. 이 혼천의는 그 기준이 북위 37도에 맞추어져 있다. 화양구곡 제 5곡인 첨성대 위치도 37도다.
우암의 친필 가운데는 '華陽'이란 글자가 있다. 이 글자는 中華의 '華'와 '一陽來復'(양의 기운이 다시 찾아온다)의 陽에서 그 의미를 취한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이를 중국에 대한 사대주의 사고로 생각하고 있다.
그러나 글자 '華陽'은 사대사상과 거리가 멀다. 우암은 당시 사회질서의 가치를 문화에서 찾았고, 그 연장선에서 명나라는 문명국, 청나라는 오랑캐 국가로 생각했다.
그런 명나라가 오랑캐국에 의해 멸망하자 유일하게 남은 동북아 문명국가는 '조선'이라고 생각했다. 즉 명나라는 대중화, 조선은 소중화로 인식했다. 바로 화양은 소중화를 상징하고 있다.
조혁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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