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방세력 중 특히 호족의 성장과 관련 있어

충북대 신호철 교수 논문서 주장

천년왕조 신라(BC57~AD935)의 멸망은 중앙과 지방의 대립이 궁극적인 원인이 됐다는 주장이 제기됐다. 특히 농민보다는 신흥 세력인 지방 호족(豪族)과의 갈등이 신라 멸망의 주된 이유가 됐다는 주장이 나왔다. 충북대 신호철(역사교육과) 교수는 한국고대사학회 최근호에 '신라의 멸망 원인' 논문을 장문(A4 15쪽)으로 기고했다. 지금까지 신라 멸망 원인에 대해서는 전문가들 사이에▶왕실·귀족 등 지배계급의 과다한 사치 ▶불교의 폐해 ▶왕도의 편재 ▶토지제도 문란 ▶고구려·백제 유민 불만 증가 ▶오랜 평화로 인한 공동목표 상실 ▶수도 천도의 좌절 등의 이론이 존재했다.그러나 이들 이론은 내용이 서로 유사하거나 중복되고 심지어 서로 모순되는 등 인과 관계가 불분명, 어느 설도 정설의 위치를 확보하지 못했다.신라 수도 경주가 한반도 동남쪽에 너무 치우져 있다는 왕도 편재설은 중국 북경, 러시아 모스크바, 미국 워싱턴 등이 국토 중앙에 위치하고 있지 않는 점을 설명하지 못하고 있다.고구려·백제 유민 불만설 또한 삼국통일 후 250년이 지난 시점까지 유민층이 존재, 과연 광복운동을 했겠는가의 물음에 잘 답을 하지 못하고 있다. ▲ 천년왕조 신라는 중앙과 지방세력 대립 때문에 멸망했다는 주장이 제기됐다. 지배층의 과다한 사치도 거론되고 있으나 포석정(그림)이 이와 관련이 있는지는 분명치 않다.
이밖에 불교 폐해론의 경우 불교가 신라 멸망에 부정적인 요인으로 작용한 것이 상당부분 인정되지만, 정작 그 사상적 내용에 있어서는 학자들마다 현격한 차이점을 보이는 등 모순된 모습을 노정하고 있다.

신 교수는 이에 대해 당시 중앙과 지방 세력의 대립을 '궁극적인 원인'이자 '원인 중의 원인'으로 지목했다. 그는 두 거대 집단의 대립을 정치, 사회·경제, 사상적인 면에서 고찰·분석했다.

그는 정치적인 면에 대해 "귀족분열, 육두품 성장, 군사조직 해이 등으로 인해 지방 호족이 城主, 장군 등을 자처하며 급속히 성장했다"며 "이 과정에서 중앙정부의 통제력이 필연적으로 약화, 천년왕조 멸망의 기운이 싹텃다"고 밝혔다.

사회·경제 면에 대해서는 "중앙귀족과 사찰이 대토지를 소유·경영하면서 국가재정이 파탄에 빠지게 된다"며 "이로 인해 농민 등 기층민 몰락, 유민 증가, 호족 세력의 독립화 현상이 일어나면서 신라는 멸망의 길로 접어들게 됐다"고 밝혔다.

사상 면에 대해서는 "신라 하대로 갈수록 중앙 지배층은 교학불교에 관심을 가지나 지방에서는 선종과 풍수지리설을 더 선호하게 된다"며 "여기서 국가 통합이 아닌 국가 분열의 모습이 나타난다"고 밝혔다.

신 교수는 "당시 사회 역학적인 주체는 중앙정부, 호족, 농민 등이나 이들의 관계가 명확히 드러나지 않고 있다"며 "따라서 앞으로 중앙정부와 호족, 호족과 농민, 농민과 중앙정부 역학 관계에 좀더 관심을 기울여야 할 것"이라고 밝혔다.

그러나 그는 압축된 결론으로 "당시 농민들이 칭제건원, 칭왕을 거론하지 않은 것으로 봐 지방호족 세력과 중앙정부의 갈등이 신라 멸망의 주요 원인이 된 것으로 보인다"며 "지방호족이 중앙정부에 충성을 하지 않은데는 여왕과 박씨왕 등장도 일조를 한 것으로 보인다"고 밝혔다.



■ 용어설명

☞신라 호족 : 당시 신분제도인 골품제도 밖에 존재했던 계층으로 지방 토호 출신이나 중앙에서 낙향한 육두품 출신들로 구성됐다. 이들은 중앙 정부의 힘이 미치지 못하는 틈을 타 자신이 다스리는 지역에서 경제력은 물론이고 군사력까지 장악했다.

☞육두품 : 신라 중앙귀족의 한 축으로, 진골 다음에 위치하고 있다. 이들은 진골간 왕위 다툼전이 벌어지자 골품제를 비판하고 반신리적인 입장을 취했다. 고려가 건국 되면서 당시 관료문화의 한 축을 담당하게 된다.

■ 종전의 신라멸망 원인 주요설

천명론최치원(동문선)군읍이 모두 적굴이 되었고 산천이 모두 전장이 되었으니, 하늘의 재앙이 어찌 우리 海東에만 흘러드는 것이냐.
왕실·사찰 사치설최승로(고려사)신라말에 불경과 불상은 모두 금과 은을 사용하여 사치함이 정도를 지나쳤으므로 마침내 멸망하기에 이르렀다.
불교 폐해론김부식(삼국사기)항간에는 塔廟가 즐비해지고 평민들은 사찰로 도망쳐서 僧尼가 됨에 병·농이 점차 줄어들어서 나라가 날로 상하여지니 어찌 난망치 않으리오.
종합 원인설이병도(한국사 고대편)1 빈부의 차이, 2 농민의 몰락, 3 귀족의 대토지 소유에 따른 公田의 사유화, 4 왕위 쟁탈전, 5 군사조직의 해이, 6 국고의 고갈.
기후설김영미(삼국사기 일부내용 근거)중국의 사료를 보면 9~11세기에 저온현상이 뚜렷히 찾아와 농민들이 가뭄으로 큰 고통을 겪게 된다. 삼국사기에도 889년 5월 가뭄이 찾아온 후 도적들이 봉기하고 대신 중앙정부는 조세를 독촉했다고 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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