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전대 이한상 교수 한국고대사학회서 주장

백제 금동관모는 지방에서 제작한 것이 아닌, 당시 수도 한성에서 만들어 내려보낸 왕의 하사품이라는 주장이 제기됐다.

특히 백제 금동관모는 같은 시기에 제작된 것이라 해도 문양과 재질에 따라 위계가 존재한다는 주장도 나왔다.

▲ 백제 금동관모는 당시 수도 한성에서 만들어 내려보낸 왕의 하사품이라는 주장이 제기됐다. 공주 수촌리(左)와 익산 입점리 금동관모 모습. 가운데는 수촌리 금동관모 문양을 확대한 모습.
대전대 이한상(역사문화학과) 교수가 지난 12일 공주대에서 열린 제 101회 한국고대사학회 정기발표회에서 '백제 금동관모의 제작과 소유방식' 논문을 발표했다.

논문에 따르면 지금까지 백제 금동관모는 천안 용원리 석곽묘, 공주 수촌리 1호분, 〃 4호분, 서산 부장리 5호분, 익산 입점리 1호분, 전남고흥 길두리 고분, 나주 신촌리 9호분 등 7곳에서 출토됐다.

이중 나주 신촌리 것은 웅진기에, 나머지 6개 백제 금동관모는 5세기 무렵의 한성기에 제작된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 이와 관련 이 교수는 금동관모의 외형, 도안, 제작기법 등을 정밀 관찰했다.

그 결과, ▶백제 금동관모는 왕의 하사품이고 ▶그 안에는 위계가 있으며 ▶출토 분포도로 볼 때 당시 백제 세력권과 상당부분 일치한다 등의 결론을 얻을 수 있었다고 밝혔다.

그는 첫번째 근거에 대해 "소유한 인물이 적고, 당시 백제의 거점지역에서만 주로 출토되고 있다"며 "이는 당시 백제왕이 지방 유력자의 이탈을 막고 또 거점지역을 지배·확보하기 위해 금동관모를 한성에서 직접 제작, 이들에게 하사한 것으로 보인다"고 밝혔다.

출토된 금동관모는 그 문양판 문양이 용봉문 계열과 초화문 계열로 대별되고 있다. 수촌리 1·4호분과 부장리 5호분에서 출토된 것은 용봉문을, 고흥고분과 옥전23호분 등에서 출토된 것은 초화문을 지니고 있다.

그는 이에대해 "당식 복식뿐만 아니라 금동관모에도 위계가 존재한 것으로 볼 수 있다"며 "상징성과 정교함 등으로 볼 때 수촌리>부장리>고흥고분 순으로 위계를 지닌 것으로 보인다"고 밝혔다.

이와 관련 이 교수는 "당시 한성에서 가까운 곳은 금동관모를 신체에 착장한 모습을 보이나 먼 곳은 비착장 모습을 보인다"며 "이것 역시 금동관모 위계와 관련을 맺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고 밝혔다.

그는 출토 분포도에 대해 "지금까지 금동관모는 당시 백제 지방거점 지역에서만 나오고 있다"며 "이는 당시 백제 세력권을 그대로 반영한 것일 수 있다"고 밝혔다.

특히 고흥에서 출토된 금동관모를 언급, "당시 한성백제가 왜와 교류하기 위해 고흥루트를 지나간 것으로 보인다"며 "이는 백제가 5세기 무렵에 이미 남해안까지 세력을 확장했음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밝혔다.

한편 이 교수는 이같은 내용을 종합, 당시 한성백제의 세력 확장 및 대倭 루트로 남한강, 내륙, 서해-남해한 등을 가졌던 것으로 보인다고 밝혔다.

이 교수는 당시 한성백제의 서해를 통한 내륙진출 루트로 아산만-천안-진천-청주 등으로 이어지는 차령산맥 이북을 제시했다. / 조혁연

# 백제 금동관모

1천500여년 전 백제권 지역의 지방 실력자들이 썼던 과시용 고급 모자에 속한다. 전체적으로 고깔 모양을 하고 있다.

관모 뒤쪽에 꽃봉우리 모양의 장식이 튀어나와 있다. 여기에는 새 깃털 등을 꼽았던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몸체에는 용봉문 등 다양한 뚫음무늬가 존재한다.



저작권자 © 중부매일 - 충청권 대표 뉴스 플랫폼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