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충북대 중원문화연구소 임용한 연구원 주장

TV사극이 큰 인기를 끌면서 조선시대 국왕에 대한 관심도 함께 높아지고 있다. 그러나 충북대 중원문화연구소 임용한 연구원에 따르면 조선국왕에 대한 정보는 잘못 알려진 것이 의외로 많다.

특히 세종, 광해군, 숙종 등 이른바 유명세를 타고 있는 국왕 사이에 이같은 현상이 두드러지고 있다. 임 연구원의 연구 내용을 지면으로 옮긴다. 그는 '조선국왕 이야기'(출판사 혜안)의 저자이기도 하다.

# 세종은 학자적인 군주였을까.

세종이 학문을 좋아 한 것은 맞다. 이른바 호학(好學)의 군주였다. 그러나 그가 학문을 좋아했던 진짜 이유는 완벽한 국가제도를 만드는데 있었다.

세종은 아무리 사소한 제도라고 역사적 사례를 연구·분석, 이의 장단점을 뽑아오도록 신하들에게 수시로 요구했다. 그러나 그것은 지나치게 세세한 면이 있었다.

세종은 군사 훈련용 나무화살 규격을 가지고 고민했고, 또 활쏘기 연습용 과녁을 무엇으로 만드느냐에도 관여했다. 심지어 이동표적 과녁을 둘러싸고 논란이 일자 세종이 나서 털실로 감은 공을 낙찰하기도 했다.

따라서 신하들은 어설프게 안건을 올리거나 적당히 뭐가 좋다고 말했다가는 세종으로부터 질문세례를 뒤집어써야 했다. 집현전도 순수 학문이 아닌 국가제도를 연구하기 위해 세워졌다.

# 숙종은 여자에 약한 왕이었을까

숙종은 장희빈 덕분에 사극에 가장 많이 등장하고 있다. 이와 관련, 대부분의 사극은 숙종을 유약하고 여자에 약한 왕으로 묘사하고 있다. 그러나 조선왕조실록의 행간을 세밀하게 살펴보면 꼭 그렇지도 않다.

숙종은 유년시절부터 천재소리를 들었던 인물로, 역대 어느 국왕보다 두뇌회전이 빨랐다. 숙종은 자신에게 유리한 정치국면을 조성하기 위해 모든 당파와 신하들을 이용하고 속였다.

인현왕후나 희빈 장씨가 폐위와 복위를 반복하고 그때마다 소론과 노론의 정권교체가 일어나며 피바람이 불었던 것은 모두 숙종의 정치적인 놀음에서 기인했다.

임 연구원은 숙종의 이러한 리더십을 '극단적인 이기주의' 유형으로 분류했다. 그러나 신하들도 숙종의 이러한 리더십을 깨닫게 됐고, 이를 정치적 행동으로 옮긴 것이 세도정치 추구다.

# 유배지 광해군이 면도를 하지 않은 까닭은

광해군 자신의 개인적인 습관이 아니라 당시 궁궐 법도가 그러했다. 조선시대 상궁이나 내시들이 남긴 회고담 등을 보면 조선국왕은 세수, 면도 등 극히 개인적인 생활까지도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고 모두 궁녀들에게 의지했다.

광해군 역시 인조반정으로 강화도에 유배되자 시중들 궁녀를 보내달라고 요구했다. 그러나 당시 조정은 궁녀와 사이에 후사(자식)가 생길 것을 우려, 처음에는 이를 거절했다.

그러나 광해군이 계속해서 세수는 물론 면도도 하지 않자 하는 수 없이 늙은 시녀 몇명을 보내줬다. 이들 시녀는 후사를 걱정하지 않아도 될 나이였다.

#조선 국왕들의 프라이버시는

많은 사람들은 조선왕조실록이 역대 왕의 프라이버시를 미주알고주알 식으로 기록한 것으로 알고 있다. 그러나 조선왕들에 대한 사적인 기록은 거의 암흑에 가깝다.

궁궐은 크게 내궁과 외궁으로 구분된다. 왕이 정사를 보는 근정전이나 편전은 외궁에 위치한다. 이런 공간적인 구조 속에 왕은 업무가 끝나면 편전 뒤로 둘러진 담을 지나 내궁 안으로 들어간다. 이 순간부터 조선 국왕들에 대한 기록은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

조선왕조실록은 국왕의 공적인 삶에 대해서는 가록한 정도로 자세히 기록했지만 프라이버시 영역은 확고하게 보호했다.

한편 임 연구원의 이같은 발표 내용은 15일 충북대 박물관(관장 박선주 교수)이 개최하는 제 14기 박물관 대학 '조선국왕 이야기' 편에서 들을 수 있다.

/ 조혁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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