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릉 축조 · 관리에 따른 징집 내용 기록

▲ 광개토대왕비는 광개토대왕의 생전 무훈을 칭송한 것이 아닌, 당시 수묘역 제도를 기록한 '석각 문서'라는 주장이 제기됐다. 광개토대왕비 모습으로 지금은 보호각이 씌워져 있다.
이성시 박사, 한국고대사학회 정기발표서 주장

광개토대왕비는 왕의 생전 무훈(武勳)을 적은 것이 아닌, 당시 수묘역(守墓役) 제도를 기록한 '석각 문서'라는 주장이 제기됐다.

이같은 주장은 처음 제기된 것은 아니나 보다 발전된 논리를 담고 있어, 고대사 학회에 적지 않은 논쟁을 불러올 것으로 보인다. 수묘역은 고대 시기에 왕릉을 축조하고 이를 사후 관리하는 제도를 말한다.

한국고대사학회 '제 100회 정기 발표회'가 얼마전 서울 홍익대학교에서 열렸다. 이 자리에서 일본 와세다대학 학술원의 이성시 박사가 이같이 주장했다.

이 박사에 따르면 고구려 장수왕(제 20대·394~491)은 아버지인 광개토대왕이 돌아가자 3년 상을 치룬 후 갑인년 9월 29일 만주 집안현 퉁거우에 아버지 능묘를 만들고 그 옆에 비를 세웠다.

사면석(四面石)의 광개토대왕비로, 높이 6.39m, 나비 1.5m, 두께 1.53m의 제원을 지니고 있다. 이와 관련 한·중·일 동양 3국 학자들은 비문 중 '광개토대왕이 64개 성, 1천400개 마을을 얻었다'는 내용을 들어 대체로 광개토왕 무훈을 칭송한 비로 봐왔다.

그러나 이 박사는 이날 발표에서 장수왕이 아버지 광개토대왕비의 생전 공적을 칭송한 것이 아닌 당시 수묘역, 즉 왕릉 축조와 관리 내용을 적은 석각 문서라고 주장했다.

그에 따르면 1천775자의 광개토대왕비는 내용상 '서론', '본론 1'. '본론 2' 등 크게 3부분으로 나눠지고 있다. 서론은 건국~광개토대왕에 이르기까지의 고구려 왕가의 세계를 약술하고 있고, 본론 1은 광개토대왕의 생전 무훈을 연대 기록으로 열거하고 있다.

이밖에 본론 2는 광개토대왕 수묘인 330家의 내역과 그들에 대한 법제화된 관리 내용을 적고 있다.

이 박사는 "이 3가지 부분 중 본론 2에 광개토대왕비를 세운 목적이 들어 있는 것으로 봐야 한다"며 "따라서 64개성, 1천400개 마을도 정복을 의미하는 것이 아닌, 능 축조자와 사후 관리인을 이 지역에서 징집한 것을 의미한다"고 밝혔다.

그는 이에 대한 근거로 광개토대왕 비문에 적혀 있는 다음 2문장을 거론했다.(편의상 의역)

'고구려에서는 조왕·선왕 이래 수묘인을 구민으로 임용해 왔지만, 광개토대왕이 스스로 취한 한·예의 백성을 임용하기로 했다'.

'이후 광개토왕은 수묘인을 서로 전매하지 못하게 하였다. 비록 부유한 자가 있어도 마음대로 살 수 없다. 이 명령을 위반하면 판 자를 형벌에 처한다'. 이때의 '구민'은 고구려인, '한·예'는 광개토대왕의 정복민을 의미하고 있다.

그는 "비문을 보면 수묘인 330家의 1/3은 고구려인으로, 2/3는 한·예인으로 한다는 내용이 나온다"며 "광개토왕이 이같은 조치를 내린 것은 왕릉 축조와 관리가 그만큼 힘들기 때문에 자국인을 배려한 의도로 볼 수 있다"고 말했다.

이 박사는 결론으로 "본론 1은 본론 2를 설명하기 위한 일종의 도입부 문장으로 볼 수 있다"며 "따라서 광개토대왕비를 건립한 목적은 아버지의 무훈을 일방적으로 칭송하는 것이 아니라 수묘역 제도의 법제적 완성을 소개하고 그 문서를 비로 명문화, 후대에 전승하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고 밝혔다. / 조혁연 chohy@jbnews.com


# 광개토대왕은

고구려 19대 왕(재위 391∼413)으로 고국양왕의 맏아들이다. 소수림왕의 정치적 안정을 기반으로 고구려 최대의 영토를 확장한 왕이다. 영락이라는 대한민국 최초의 연호를 사용했으며 백제를 치고, 동예를 통합하고 동부여를 정벌했다. 400년에는 신라 내물왕의 요청으로 5만의 원군을 보내어 왜구를 격퇴시키기도 했다.
저작권자 © 중부매일 - 충청권 대표 뉴스 플랫폼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