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굴된 소뼈 중에서 유독 발굽만 존재 안해

충주대 백종오 교수, 논문서 밝혀

고구려인들이 '소발굽 점'(牛蹄占)을 봤다는 주장이 새롭게 제기됐다. 소발굽 점은 중국 고문헌에 종종 등장하나 고고학적 해석이 뒷받침되기는 이번이 처음이다.

충주대학교 백종오(교양과정부) 교수가 최근 '남한 내 고구려 유적 유물의 새로운 이해' 논문을 150여쪽 장문으로 발표했다.

논문에 따르면 남한 내에서는 한강, 임진강, 금강 수계를 중심으로 90여 곳의 고구려 유적이 존재하고 있다. 이중 당포성, 무등리1·2보루, 아미성, 두루봉보루, 육계토성 등 10개 유적에서는 평기와가 출토됐다.

▲ 당시 보루의 병사 막사 조감도.
반면 아차산 홍련봉 1보루와 호로고루에서는 연화문 수막새가 나왔다. 따라서 건축 위계가 높은 것으로 보이는 홍련봉 1보루와 호로고루는 고구려 남진 과정의 지역 사령부가 설치됐던 장소로 추정되고 있다.

이와 관련, 호로고루 유적에서는 탄화된 쌀·조·콩·팥 등의 곡물류와 소·말·멧돼지·개·사슴·노루 등 각종 동물뼈가 다량으로 출토됐다.

그러나 ▶곡물류의 경우 창고 저장용으로 보기에는 그 양이 너무 작고 ▶멧돼지 뼈의 경우 머리 부분만 집중적으로 출토됐으며 ▶소뼈의 경우는 유독 발굽이 나오지 않은 점이 국내 사학계의 커다란 궁금증으로 남아 있었다.

이에 대해 백 교수는 "고구려 병사들은 연화문 수막새가 출토된 건물지에서 전쟁 승리를 기원하는 제(祭)나 어떤 의례를 지냈고, 이때 소발굽 점을 본 것으로 보인다"고 밝혔다.

그는 "다른 동물뼈는 파손 정도가 매우 심하나 멧돼지의 경우는 머리 부분만 집중적으로 나왔다"며 "이는 제사용으로 사용했기 때문으로 보인다"고 밝혔다.

이와 함께 "말뼈의 경우 전신뼈가 모두 완형으로 남아 있는데 비해 소는 발굽만 제외하고 나머지 뼈는 수습됐다며 이는 당시 고구려 병사들이 소발굽 점을 봤기 때문으로 보인다"고 밝혔다.

그는 지금까지 주장에 대한 문헌적인 근거로 중국 역사서인 '三國志 高句麗傳', '舊唐書', '翰苑'의 내용을 인용했다.

의역한 '三國志 高句麗傳'에는 '10월 국중대회에서 水神을 맞이하여 국동의 水上에 돌아와서 제사를 지낸다. 나무를 다듬어 神座에 세운다'는 내용이 나오고 있다.

'舊唐書'에는 '대부분 볏단으로 얹었으나 불교사원과 신묘, 왕궁, 관청 등은 기와를 사용하였다'는 내용이 등장하고 있다.

이밖에 '翰苑'에는 '전쟁이 있을 때도 역시 제천을 하는 데 소를 잡아 발굽을 보고 길흉을 판단한다'는 내용이 나오고 있다.

백 교수는 이에 대해 ▶당시 제사는 물가에서 이뤄졌고 ▶제사를 행하던 건물에는 기와가 얹혀져 있었으며 ▶전쟁을 앞두고는 소발굽 점을 본 것이 문헌적으로도 입증되고 있다고 밝혔다.

실제 연화문수맥새가 출토된 아차산 홍련봉 1보루(서울 광진구·한강수계)와 호로고루(경기도 연천·임진강 수계) 모두는 강가의 고지대에 위치하고 있다.

그는 결론으로 "두 유적은 군사 기능도 있었지만 의례공간 의미가 더 부각되고 있다"며 "따라서 남진한 당시 고구려는 두 곳을 중심으로 지역 행정을펼쳤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고 밝혔다. / 조혁연

■ 고구려가 보루를 쌓은 까닭

고구려 장수왕이 개로왕을 죽이며 한성을 공취하자 백제는 서기 475년 웅진(공주)으로 천도하게 된다. 이후 고구려는 80년간 한강유역을 차지하고 남진 경영을 시도한다. 이 과정에서 한강과 임진강 수계에 수십 개의 보루(요새)를 쌓은 것으로 추정된다. 고구려는 551년 나·제 연합군이 협공을 하자 이들 지역 보루를 포기하고 북으로 철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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