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북大 유해발굴센터, 한국전쟁 민간인 희생자 논문

▲ 청원 분터골 희생자 모습(上)으로, 두 손을 등 뒤로 결박당한 유해가 많았다. 아래쪽 사진은 현장에서 수습된 명찰과 '朴奉羽' 인명 도장.

청원 분터골 등 한국전쟁 때 집단 처형된 민간인들의 일부는 1차 총격후 다시 확인 사살을 당한 것으로 나타났다.

충북대 유해발굴센터(소장 박선주 교수·중원문화연구소 내)가 '2007 유해발굴 보고서'를 발간하면서 관련 논문 '한국전쟁기 민간인 사망자의 인류학적 연구'도 함께 내놨다.

지난해 충북대, 충남대, 한양대, 경남대 등 전국 4개 대학은 진실화해위원회의 의뢰로 유해 발굴단을 구성, 각각 청원 분터골, 대전 골령골, 경북 경산 코발트광산, 전남 구례 봉성산 등의 집단 매장지를 조사했다.

그 결과, 이들 4개 지역에서는 청원 분터골 118, 대전 골령골 34, 경산 코발트 광산 107, 구례 봉성산 14개체 등 총 273개체의 유해가 수습됐다.

이와 관련해 이들 매장지를 정밀 조사한 결과, 청원 분터골과 대전 골령골에서는 1차 총격 후 다시 확인 사살하는 행위가 뒤따랐던 것으로 나타났다.

박 교수는 "총알을 발사할 경우 그 탄피는 발사자 바로 아래 떨어지는 것이 상식"이라며 "따라서 매장지에서 탄두와 함께 탄피가 동시에 나오는 것은 1차 총격 후 지근거리에서 2차 확인 사살이 뒤따랐음을 의미한다"고 밝혔다.

이밖에 논문은 매장 형태에 대해서도 상세하게 기술, "희생자 유해의 대부분이 좁은 도랑에서 앞으로 고꾸라진 모습으로 발견됐다"며 "따라서 청원 분터골의 경우 당시 민간인의 손을 등 뒤로 결박한 상태에서 꿇어 앉혀놓고 사살한 것으로 보인다"고 밝혔다.

대전 골령골에 대해서는 "좁은 고랑에서 무릎이 굽혀진 것과 뼈가 완전히 펴진 것 등 2 종류의 유해 유형이 드러났다"며 "이 경우 전자는 좁은 곳에 몰아넣은 후 앉혀놓은 상태서 총을 쏜 것이고, 후자는 당시 매장자가 비교적 여유를 가지고 시신을 처리한 증거"라고 밝혔다.

이밖에 "구례 봉성산의 경우 탄피가 발견되지 않는 것으로 봐 다른 곳에서 사살한 후 시선을 옮겨와 매장했고. 경산 코발트광산의 경우는 수직갱도 입구에서 처형 행위가 이뤄지면서 총격을 받은 시신들이 갱도 아래로 떨어진 것으로 보인다"고 밝혔다.

한편 이들 유해에 대한 인류학적인 조사를 한 결과, 당시 희생자들의 평균키는 165㎝ 정도였던 것으로 조사됐다.

조사 결과, ▶남성은 256개체, 여성은 7개체가 수습돼 94%대 2% 정도의 성별 분포를 보였고(4%는 불명) ▶나이는 20~24세가 48%로 가장 많으며 ▶이들의 평균키는 165㎝ 정도로, 지금 사람보다 크게 작았던 것으로 조사됐다.

병무청은 얼마전 2007년 전국 입대 연령자의 평균키가 173㎝라고 발표한 바 있다. 따라서 당시 여성 희생자가 2%(7개체)였던 점을 감안하더라도 당시 희생자들의 신장이 그리 크지 않았음을 보여주고 있다.

이밖에 이번 논문은 당시 희생자의 10% 정도가 충치를 앓았고, 또 당시 문화상을 엿볼 수 있는 '朴奉羽', '남용O' 사람 이름과 '총무부', '中' 자가 새겨진 단추 그리고 명찰도 발굴됐다고 밝혔다. 이중 명찰과 '中' 자 명문 단추는 당시 희생자 중에 10대 학생도 있었음을 추정케 하고 있다. / 조혁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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