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제두로 시작한 '강화학파' 구한말 진천 정착

구한말~일제강점기의 진천 강화학파는 민족주의를 지향했으며 이 것이 독립운동의 발화점이 됐다는 주장이 제기됐다.

상산고적회와 충북대 중원문화연구소는 12일 오전 충북대 개신문화관 1층 회의실에서 제 1회 '한말 일제하 충북 진천의 강화학파 지사들과 민족운동' 학술대회를 개최한다.

▲ 초기 독립운동의 거물이었던 이상설의 생가. 이상설은 정제두에서 부터 시작되는 강화학파 내지 양명학의 막내격이었다.
이날 학술대회에는 정호훈(연세대), 정두영(신구대), 신영우(충북대) 교수가 등단, 각각 '18∼19세기 조선학계의 동향과 양명학', '조선후기 강화학파 연구의 현황과 진천', '한말 일제하 강화학파와 민족주의운동' 제목의 주제 발표를 할 예정이다.

이중 신 교수의 논문이 '소론계 가문의 진천 정착'을 소단락으로 싣는 등 로컬성이 강한 주제를 다루고 있어, 지역적인 관심을 끌고 있다.

구한말~일제강점기 때의 강화학파는 이 시기 진천지역에 세거를 이뤘던 홍승헌(1854~1914)·정원하(1855~1925)·정인표(1855~1935)·정은조(1856~1926)·이상설(1870~1917)·정인보(1893~1950) 등 6인의 학인 관료를 일컫고 있다.

이와 관련, 보재 이상설, 위당 정인보 등을 제외한 나머지 4인의 삶과 사상 그리고 격동기의 시국관에 대해서는 연구가 크게 미흡한 편이었다.

신 교수는 이에 대해 진천 강화학파 6인은 개화학파의 반대편에 위치, 강한 민족주의 성향을 나타냈으나 그렇다고 동학에 대해 우호적인 생각을 갖고 있지는 않았다고 밝혔다.

그는 그 근거로 ▶일본군이 경복궁을 점령하는 갑오변란이 일어나자 강화도로 들어가 양명학에 더욱 천착했고 ▶대신 동학에 대해서는 정감록의 유언비어 현혹으로 본 점 등을 꼽았다.

신 교수는 이에 대해 "당시 진천 강화학파는 농민들의 아픔과 고통을 누구보다 공감한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며 "그러나 왕조가 붕괴되는 것에 대해서는 유교사회 해체로 봐, 극력 반대한 것으로 보인다"고 밝혔다.

이와 함께 "따라서 진천 강화학파는 반일, 반동학이라는 시국관을 지니게 됐고 이같은 사상은 훗날 정인보에 이어 신채호, 박은식, 신규식, 김규식 등에게 절대적인 영향력을 미친 끝에 독립운동의 사상적 기반이 된다"고 밝혔다.

한편 그 동안 잘 알려지지 않았던 강화학파 6인의 마지막도 이번 신 교수의 논문을 통해 비교적 소상히 밝혀졌다.

논문에 따르면 이중 홍승헌은 만주 망명객 중 가장 먼저 사망했다. 이후 그의 영구는 석달 보름 후 기차편으로 천안으로 운구, 그의 아들 경식에 의해 지금의 범바위 뒷산에 안장됐다. 그러나 그의 종손이 6.25 때 납북된 후 현재 진천에는 그의 후손이 남아 있지 않다.

신 교수는 "강화학파들이 세거를 이뤘던 진천 지역내 거주지는 일부를 제외하면 대부분 망실된 상태로 이의 보존·복원과 함께 학문적 연구가 보다 확대돼야 한다"며 "구한말~일제강점기 독립운동사를 연구하는데 있어 이들 강화학파는 길목에 위치하고 있다"고 밝혔다. / 조혁연

■ 강화학파는

조선 후기에 정제두를 비롯한 학자들이 강화도를 중심으로 학문 유파를 형성한 것이 그 기원이 된다. 정제두는 자신과 가까운 소론들이 정치적으로 어려움을 당하자 강화도로 들어가 은거했다. 그 뒤 강화학파는 200여년 동안 맥을 이으며 홍승헌·정원하·정인표·정은조·이상설 등에게 영향을 미쳤다.

이들이 강화도를 떠나 왜 당시 노론이 득세하던 진천에 정착했는지는 분명치 않다. 진천에서 학맥을 복원한 진천 강화학파는 다시 정인보, 신채호, 박은식, 김택영 등에 영향을 미치며 독립운동을 꽃피우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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