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에게 전업시인과 바꾸고 싶은
직업이 있는지를 묻는다면
강진군 강진읍 평동리 100번지
성(聖)요셉 여자고등학교
등 굽은 청소부가 되고 싶다
(.......)
하루하루 쑥쑥 자라는 여학생들의
작아진 책걸상을 단정하게 고쳐주거나
교정 여기저기에서 시집과 공책
몽당연필을 주워 제 주인 찾아주며
성(聖)요셉 여자고등학교와 함께
평화롭게 살아가고 싶은 것이다
선생님들의 화장실을 손 청소하고
여학생들의 화장실을 물청소한 뒤
퇴근 후에는 성요셉 동산에 들러
깜깜해질 때까지 무릎 꿇고
내 안으로 찾아온 신에 대해 묵상할 것이다
그렇게 늙어 밝은 눈이라도 생긴다면
여학생이 책상서랍 속에 넣어두고
잊어버린 마가렛꽃 같은 꿈을
순결한 마리아 같은 여학생이
책갈피 어딘가에 잃어버린
사랑의 설렘을 모두 찾아서
하느님의 선물처럼 전해주고 싶다
여기 시(詩)보다 아름다운 교정에서
지금 꾸는 꿈이나 사랑이
손수건 크기만큼 작다할지라도
사는 동안 영원히 아름다울 것이라고
그 아름다움이 너를 덮고
너의 인생을 다 덮을 수 있을 것이라고
축복처럼 속삭여주고 싶다
(.......)
- '시인시각' 2008년 가을호

* 이런 청소부가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여학생이 잊어버린 꿈과 잃어버린 사랑의 설렘을 찾아서 하느님의 선물처럼 전해주는 청소부가 있다면 학교는 얼마나 아름다울까요? 학창시절에 꾸는 꿈과 사랑이 네 인생을 아름답게 덮어줄 것이라고 말하는 학교아저씨가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전직시인이 여학생들의 책걸상을 고쳐주거나 화장실청소를 하는 청소부가 된다는 것이 현실적으로는 가능하지 않겠지만 이 시는 어떻게 사는 것이 가치 있고 아름답게 사는 것인지에 대한 생각을 하게 합니다. 평화롭게 사는 삶, 내 안으로 찾아온 신에 대해 묵상하며 사는 삶, 꿈과 사랑을 잃지 않고 사는 삶을 살 수 있다면 청소부가 되어도 좋으리라는 시인의 마음이 아름답습니다.

▶정일근 약력

1958년 진해에서 태어났으며 1985년 한국일보 신춘문예를 통해 등단했다. 시집 '바다가 보이는 교실', '마당으로 출근하는 시인', '경주남산' 등이 있으며, 소월시문학상, 시와시학 젊은 시인상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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