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웃집 남자, 이웃집 여자
왕가위 감독의 영화 '화양연화'(2000)에서 리첸(장만옥)과 차우(양조위)가 함께 국수를 먹거나 신문, 무협지를 읽는 좁은 방 혹은 호텔에는 어김없이 거울이 있다. 하나이거나 여러 조각으로 된 그 거울 속에 둘의 모습이 담길 때, 화면은 종종 여러 개의 면으로 분할돼 시선을 교란시킨다. 두 사람의 시선과 행동의 방향이 뒤엉켜버리는 그 혼란스러운 이미지에서 실제의 그/녀와, 실제의 반영을 분간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할 지경이 된다.
모든 것이 끝나고 난 5년 뒤, 어린 아들의 손을 잡고 리첸은 옛 집으로 돌아온다. 그런데, 제대로 보이지도 않는 아이의 얼굴에서 얼핏 익숙한 누군가를 본 듯한 느낌이 들었을 때, 아차 싶어진다. "잘못한 것도 없는데 괜히 우리가 잘못한 것 같아요""우리만 결백하면 되는 것 아니에요?"의 '무죄증명'을 위한 둘의 항변마저, '무고하고 결백한 피해자 연기'였을지도 모른다는 데 생각이 미치는 것이다.
장만옥과 양조위의 호텔 정사 장면을 기껏 다 찍어놓고 최종 편집 과정에서 들어냈을 정도로 그렇게 영화는 욕망의 종착점에 대해 모르쇠로 일관한다. 에로스의 분출은 가능한 한 철저히 통제되는 것이다. 여자는 남자의 팔목을 붙잡는 대신 자신의 팔뚝을 피 맺히도록 꼬집으며, 남자는 여자의 몸 대신 담배만 연신 빨아들인다. 그저 그녀의 손등에 그의 손이 포개지고, 그의 어깨에 그녀의 고단한 머리가 살짝 놓였을 뿐. 그런데도 관능은 이미 충분해서 위태롭게 일렁인다.
닿을락 말락 어깨가 스쳐지나가는 좁은 골목과 비 오는 계단, 그 모든 공간들에서 그녀는 먼저 지나가지만, 그 곳에 남는다. 그리고 나중에 다가왔다 지나가지만 역시 그 곳에 남은 그의 몸과 '뒤섞인다'. 그녀의 팽팽하게 긴장된 다리와 살짝 핏줄 선 그의 팔, 상기된 여자의 귓불과 남자의 뜨거운 입술이 텅 빈 화면에서 뒤엉키고, 'Yumeji's Theme''Quizas, Quizas, Quizas'의 선율 속에 단단히 응결되는 것이다.
영화는 칸 영화제 출품 기한에 쫓기며 갑작스레 촬영됐다는 앙코르와트 장면으로 끝난다. 사실 뜬금없다고 해야 할 이 엔딩은 그런데도 이보다 더 마침맞을 수 없는 것이 된다. "티켓이 하나 더 있다면 나와 함께 가겠소?""내게 자리가 있다면 내게로 올 건가요?", 제 때 답을 얻지 못하고 어긋나버린 두 개의 질문으로 종료된 그들의 이야기를 앙코르와트의 흙벽 아닌 어느 곳에 봉인할 수 있었겠는가, 먹먹한 심정으로 수긍하게 되기 때문이다. / 박인영·영화 칼럼니스트
■ 치파오=고약스레 사람을 옭죄는 중국 전통의상 치파오를 입은 장만옥의 몸 중에서 특히 보기 불편한 건 목이다. 가뜩이나 가늘고 긴 목이, 인정사정없이 뻗쳐 올라간 단단한 깃에 봉쇄된 것처럼 보인다. 이렇게도 저렇게도 목을 움직이기 불편할 그 옷을 입으면 꼭 마음의 명이 아닌 옷의 명을 따라 고개를 들고 세상을 봐야할 것만 같다. 그래서 리첸은 끝내 욕망의 소리를 외면해야했던 것일지도 모른다. 누군가 '아름답고 야하고 슬픈 일종의 바디 페인팅'이라 적은, '장만옥의 몸을 감싼 치파오'는 육체를 구속하는 만큼 더욱 치명적인 관능을 발산한다. '화양연화'의 독보적 오브제로서 압도적인 스펙터클을 선사하는 그 치파오는 1960년대 홍콩을 무대로 억압과 욕망의 역설을 명료하게 형상화한다.
■ 무드의 영화/어른의 영화='In The Mood For Love'라는 영어 제목이 자복하듯, '무드'는 '화양연화'의 모든 것이다. "내가 원한 것은 지금보다 훨씬 은근한 시대였던 당시의 분위기를 재현하는 것 뿐이었다"는 감독은 상해에서 홍콩으로 건너오던 62년, 당시 5살 어린아이가 체험했던 홍콩의 시대적 분위기, 무드를 복원한다. 그리고 사랑이라는 특별한 감정에 장악되는 시간과 공간의 느낌을 냇 킹 콜의 선율을 빌려 총체적으로 환기시킨다. 그래서 영화 '화양연화'를 가슴으로 받아들이는 유일한 관람방식은 '무드'에 푹 젖는 것이 된다. 그리고 이러한 '이완'과 '몰입'이 속도의 열정에 지배당하는 20대에는 좀처럼 쉽지 않다는 점에서 '화양연화'는 천생 '어른의 영화'가 될 수밖에 없다. "내가 만든 최초의 어른의 영화"라는 감독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면, 그는 이미 질풍노도의 시간을 저만치 지나 삶의 피로와 충분히 친숙한 나이가 돼 있을 것이다.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 지원으로 게재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