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하 0.6m에 적심·줄적심·담장 석렬 존재

▲ 충주시 가금면 중앙탑 인근 지하에 통일신라 시대의 것으로 추정되는 대규모 건물지가 존재하는 것으로 밝혀졌다. GPR 탐사 모습(위)과 건물지를 의미하는 유구 흔적(아래 사진안의 직사각형).
첫 GPR조사

충주시 가금면 중앙탑(국보 제 6호·정식명 중원탑평리칠층석탑) 인근 지하에 통일신라 시대의 것으로 추정되는 대규모 건물지가 존재하는 것으로 밝혀졌다.

특히 이 건물지는 1개가 아닌, 담장을 지닌 3~4개의 복합 건물지인 것으로 추정돼 통일신라 시대 중원경 치소(행정·군사 중심지)일 가능성이 매우 높다는 분석이 나오고 있다.

■적심 최대 7개= 국립 중원문화재연구소(소장 김성배)는 올 상반기 충주 가금면 탑평리 117번지 일대를 3개 구역으로 나눠 충북에서는 처음으로 이른바 GPR(지표 레이다 탐사·Ground Penetrating Rader) 방식의 탐사작업을 벌였다.

GPR은 레이다를 지하에 쏴 문화재 존재 여부를 확인하는 탐사 방법으로, 유물·유구가 있는 곳은 반사 에너지값이 다르게 나타난다. 그 결과, 중앙탑 북쪽 500m 지점에 위치한 1구역(100x85m) 지하 0.6m에서 대규모 복합 건물지를 추정케 하는 적심, 줄적심, 담장석렬, 기단석렬 등 다양한 고건축물 유구가 포착됐다. 특히 일부 적심의 경우 그 수가 최대 7개에 이르는 것으로 추정됐고, 또 적심 칸 사이의 넓이도 4m에 이르는 것으로 나타났다.

■사찰 배치와는 분명히 달라= 이처럼 중앙탑 인근에 대규모 복합 건물지가 존재하는 것으로 나타나면서 이 건물지의 용도에 국내 고고학계의 관심이 쏠리고 있다. 이와 관련 여러 고고학적인 정보를 종합해 볼 때, 사찰이 아닌 통일신라의 중원경 치소(治所)일 가능성이 높다는 분석이 나오고 있다.

황인호(38) 학예연구관은 "고건축 사찰의 경우 보통 적심 칸수가 3개이고 또 칸 사이의 넓이도 2m 정도"라며 "따라서 이번 건물지는 사찰보다 규모가 큰 관청 타운일 가능성이 매우 높다"고 말했다.

이와 함께 "처음에는 적심이 5개인 것으로 파악됐으나 조사가 안된 도로부지에 2개 정도 더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며 "이를 바탕으로 일대 지역을 종합 분석한 결과, 당시 최소 3~4개의 건물이 존재했던 것으로 추정된다"고 밝혔다.

이밖에 ▶중앙탑에서 1구역까지 거리가 500여m에 이르고 ▶또 3~4개로 추정되는 건물지가 가람 배치와 사뭇 다른 점도 일대가 사찰터가 아닌 통일신라 중원경 치소였을 가능성을 한층 높이고 있다.

■5소경 치소발견, 아직 전국적 사례없어= 한편 이번 건물지가 발굴조사를 통해 중원경 치소로 확인될 경우 중원고구려비(국보 제 205호), 누암리고분군(국가사적 제 463호), 하구암리고분군, 장미산성(국가사적 제 400호), 탑평리칠층석탑 등이 왜 일대 반경 2㎞ 안에 밀집돼 있는지에 대한 궁금증이 상당부분 해소될 것으로 보인다.

지금까지 학계는 '통일신라가 고구려 국원성 자리에 중원경을 설치했고, 그 중원경은 탑평리 부근, 장미산성, 충주시내(교현동) 중 한 곳일 것이다'라고 추정해 왔으나 고고학적 발굴로는 입증되지 않아왔다.

뿐만 아니라 통일신라는 6~7세기 무렵 서원경(청주), 남원경(남원), 북원경(원주), 금관경(김해) 등 5소경을 설치했으나, 그 치소가 발견된 사례는 아직 전국적으로 존재하지 않고 있다.

황 연구관은 "중원경 치소로 확인될 경우 역사적 궁금증은 물론 충주 관광산업에도 큰 도움이 될 것으로 보인다"며 "특히 치소라는 고대 도시형 유적 발견은 학문적으로도 매우 큰 가치를 지닌다"고 말했다. / 조혁연

# 용어해설

☞중원경: 신라 진흥왕은 6세기 무렵 대가야를 통합한 후 충주에 국원소경을 설치했다. 가야출신 우륵, 문장가 강수, 명필가 김생은 이때 충주로 이주했다. 이후 통일신라 경덕왕 때 대대적인 정비와 함께 중원경으로 개칭했다.

☞적심과 줄적심: 적심은 주춧돌(초석)의 기초를 다지기 위해 돌다짐을 한 것을, 줄적심은 담장의 기초를 튼튼히 하기위해 역시 돌다짐을 한 것을 의미한다.
저작권자 © 중부매일 - 충청권 대표 뉴스 플랫폼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