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용한씨, 충북대 박물관대학 특강

조선의 멸망은 정치적인 요소 외에 무기 기술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는 주장이 제기됐다. 특히 우수한 화포를 만들어 놓고 이를 개량하지 못한 것이 주요 원인이 됐다는 지적이 나왔다.

임용한 전 중원문화소 연구원이 최근 충북대 박물관 대학(제 14기) 강의에서 '전쟁과 무기' 제목의 특강을 가졌다.

그에 따르면 15세기까지 한민족이 만든 활 성능은 동북아 삼국에서 단연 최고였다. 장단점을 동시에 지니고 있었으나, 장점이 단점을 크게 앞섰다.

▲ 한민족은 전통적으로 활을 잘 다뤘다. 그러나 조선은 무기기술의 세계 조류에 뒤지면서 국가 멸망을 길을 걷게 된다. 고구려 무용총 수렵도 모습.
한국 전통의 활은 ▶황소 1마리가 필요할 정도로 제작비가 비싸고 ▶제작기간도 1년 정도 걸렸으며 ▶이밖에 평소에는 활줄을 풀어놓아야 하는 등 단점을 적지 않게 지니고 있었다.

그러나 한국 전통의 활은 평균 사거리가 140m 정도됐고, 체력이 좋은 군사는 300m 가까이 쏠 수 있을 만큼 성능이 매우 빼어났다. 이에 비해 중국활은 60~80m, 일본활은 25m 정도 밖에 되지 않았다. 이런 환경은 중세 일본인들이 활보다는 칼을 더 선호하는 직접적인 계기가 됐다.

그는 "일본은 기후가 매우 습하기 때문에 기껏해야 나무활 정도 밖에 만들 수 없었다"며 그러나 "이 나무활은 크기만 클뿐 사거리가 매우 짧아 유용한 무기가 되지 못했다"고 밝혔다.

이와 함께 "그러자 그들은 이를 보완하기 위해 무사도를 만들기 시작한다"며 "아이러리컬하게도 이것이 오늘날 '일본인=무사도'의 상징이 됐다"고 말했다.

이처럼 조선은 전통활의 성능을 바탕으로 주변국과 군사적 균형을 맞출 수 있었다. 게다가 고려말 최무선이 화약무기를 만들면서 무기기술 우위력을 어느정도 계속 보유할 수 있었다.

그러나 조선은 무기기술의 우위를 선점했으면서 결과적으로 이를 지키지 못했다. 국방의식이 부족했다기 보다는 상업과 국제무역이 발달하지 않은 결과였다.

그는 "조선은 임진왜란 때 조총을 노획하자 이를 제작하고 주력무기를 활에서 조총으로 바꾼다"며 "그러나 이를 더이상 개량하지 못하면서 국운을 잃게 된다"고 밝혔다. 반면 포르투칼로부터 조총을 먼저 받아들였던 일본은 18세기에 또 한번 주력무기를 개량, 국운 상승의 기회로 삼았다.

그는 "18세기에 이르러 일본 해안포 진지는 페리제독 전함에 장착된 강철 대포로 인해 박살나 버렸다"며 "이를 계기로 일본은 개화를 결정했고, 그 결과 조선으로 침입해 올 때는 서양총을 복제하는 단계에서 벗어나 세계 최고 수준의 소총제작 기술을 지니게 된다"고 말했다.

그는 결론을 대신해 국가 고립주의의 위험성을 언급했다. 이는 조선 500년이 고립주의 때문에 멸망했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그는 "조선말과 같이 국가 고립주의에 빠지면 국제정세에 둔감해 지고 자기 중심적 사고를 하게 된다"며 "그러나 이는 세계 변화의 흐름에 동승하지 못하면서 국운 쇠약의 결과를 낳는다"고 밝혔다.

/ 조혁연
저작권자 © 중부매일 - 충청권 대표 뉴스 플랫폼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