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시대 격전장 충북 … 鐵 때문이었다?

교과서 밖의 충북역사2

충북은 국토의 중심부에 위치하고 있기 때문에 교통의 요지를 많이 갖고 있다. 우리나라 제 1호 고갯길이 충주 하늘재와 제 2호 고갯길이 단양 죽령이 이를 입증하고 있다.

그러나 교통의 요지는 그 특성상 전쟁이 일어날 경우 격전장으로 변하기 쉽다. 실제 삼국시대 150년 전쟁의 밀고 당긴 주무대는 충북이었다. 지금도 당시의 정서가 유전돼, "중원 민심을 얻어야 대권을 쥘 수 있다"는 말이 회자되고 있다.

▲ 삼국시대 이후 충주는 지금의 사과만큼이나 鐵이 유명했다. 지난 10월 충주시 이류면(고려시대 다인철소)에서 발굴된 각종 철제품 유물들. ◆ 고대국가 진입의 필수, 가히 금속의 왕= 그러나 역사 전문가들은 충북이 삼국시대 격전장이 된 또 다른 이유를 철(鐵)에서 찾고 있다. 철은 강인하면서 대단히 실용적인 성격을 지니고 있다. 가히 '금속의 왕'으로, 고대 무기, 농기구 등은 모두 철을 통해 얻어졌다.따라서 철을 손에 쥔 집단만이 고대국가로 발전할 수 있었다. 철기문화가 처음 도입된 원삼국 시기를 달리 '초기철기' 시대로 부르는 것은 이 때문이다. 삼국시대의 충북은 왜 철기문화의 최전방에 위치할 수 있었을까. 철제품을 얻으려면 원료인 철광석과 제련시설인 노(爐)를 갖추는 것이 필수적이다.삼국시대 때 충북은 두 요소를 모두 갖고 있었다. 바로 철광석 산지로서의 충주와 제련시설의 진천 석장리이다. 지금은 거의 폐광이 됐지만 충주는 본래부터 타고 난 철산지였다. 몇년전 충주박물관이 충주지역 일대에 대한 고대 야철지를 조사했다. ▲ 지난 94년 국립 청주박물관팀이 진천 석장리에서 발굴한 제련과 관련된 송풍관 모습. 이는 당시 이곳에 지금의 포항종합제철과 같은 시설이 존재했음을 의미한다.
◆ 이류면 한 곳에만 40여곳 야철지= 그 결과, 이류면, 가금면 창동, 노은면 수룡, 소태면 야동, 충주시 금릉동 등에 야철지가 존재했던 것으로 나타났다. 특히 이류면에는 40여군데의 고대 야철지가 존재했던 것으로 조사됐다.

이 때문에 칠지도(七支刀)를 만든 곳이 '충주일지 모른다'는 추정이 끊임없이 나오고 있다. 칠지도는 백제가 일본 왕실에 보낸 보검으로, 일본서기는 그 생산지가 한반도 '곡나철산'(谷那鐵山)이라고 적고 있다.

'충주=철산지' 명성은 고려시대에도 그대로 이어졌다. 고려시대 최자가 쓴 '삼도부'(三都賦)는 '철이 바위를 뚫지 않아도 산의 골수처럼 흘러 나온다'고 적고 있다.

'중원과 대령의 철은 빈철, 납, 강철을 내는데 바위를 뚫지 않아도 산의 골수처럼 흘러나와 뿌리와 그루를 찍고 파내되 무진장 끝이 없네. 홍로에 녹여 부으니 녹은 쇠가 물이 되어 불꽃에 달군 양문, 물에 담군 음문을 대장장이 망치 잡아 백번 단련하니 큰 살촉, 작은 살촉, 창도 되고 갑옷도 되고, 칼도 되고 긴창도 되고, 화살도 되고 작은 창도 되며, 호미도 되고 괭이도 되며, 솥도 되고 물통도 되니, 그릇으로는 집안에서 쓰고 병로로는 전쟁에 쓰네.'

◆ 몽고군 충주 집착도 鐵과 관련 있어= 서두의 '대령'은 황해도 해주를 의미한다. 역사학자들은 몽고군이 고려시대 한반도를 침입했을 때 충주성 공취에 사력을 다한 이유도 철에 있었던 것으로 보고 있다. 고려 고종 때 다인철소(多仁鐵所) 사람들은 몽고군을 물리친 공으로 익안현(翼安縣)으로 승격하게 된다. 바로 앞서 '40여곳의 야철지가 있었다'고 기술된 지금의 충주시 이류면이다.

중원문화재연구원(원장 차용걸 충북대교수)은 지난 10월 다인철소가 존재했던 곳으로 추정되는 이류면 '노계마을'에서 야철(冶鐵) 유적 외에 숯가마, 공방터 등 제철 관련 유물을 다량 발굴한 바 있다. 이밖에 솥 3점과 다리가 셋 달린 솥(鼎) 2점 등도 수습했다.

충주 일대에 제련노 시설이 없었던 것은 아니나 삼국시대 때 종합제철유적은 진천에 존재했다. 국립 청주박물관(당시 관장 이영훈)은 지난 94~97년 4차례 발굴작업을 통해 진천군 덕산면 석장리 한 구릉에서 백제 초기(3~5세기) 것으로 추정되는 고대 제철 유적지를 발견했다.

"뭐 고대 제철지는 흔한 것 아니냐"고 반문할 수 있지만 석장리 유적지는 그 이상의 의미를 지니고 있다.일반적으로 철기는 철광석 채취-제련-주조-단조 등의 공정을 거쳐 제작된다. 이 과정은 언뜻보면 쉬운 것 같지만 융해점 온도 등이 민감한 영향을 미치기 때문에, 지금도 고난이도의 기술로 분류되고 있다.

이와 관련 석장리 유적을 정밀 분석한 결과, 일대에는 당시 모든 공정이 존재했음이 밝혀졌다. 이를 방증하는 것으로 제철로, 송풍기, 철재(일명 슬러그), 철도자(鐵刀子) 등의 유물이 일대 구릉에서 발견됐다.

이는 석장리 유적이 오늘날로 치면 '포항제철' 역할을 했음을 의미하고 있다. 학계는 백제가 이처럼 앞선 철제련 기술을 가졌기 때문에 한강 유역을 오랫 동안 지배할 수 있었다고 보고 있다.

그리고 일본으로 수출된 백제 철기술이 열도의 철기시대를 열은 것으로 보고 있다. 이 때문에 당시 일본 유력지들은 진천 석장리 유적을 사진을 곁들여 매우 이례적으로 보도한 바 있다.

◆ 장미산성=鐵경영 관련설도= 충주서 서울 방향으로 차를 몰다보면 가금면 장천, 가흥리에 이르러 사적 제 400호인 '장미산성'을 만날 수 있다. 해발 342m의 비교적 낮은 산정에 위치하고 있지만, 전체 길이가 2천940m가 될 정도로 제법 길다. 그리고 근처 3개의 큰 물줄기가 해자(방어용 저수) 기능을 자연스레 담당하고 있는 등 한 눈에 봐도 범상찮은 산성임을 알 수 있다.

이와관련, 중원문화재연구원 발굴팀은 몇년전 '장미산성이 4~5세기 무렵 한성 백제에 의해 최초 축조된 것이 확실하다'는 내용을 발표했다. 발굴팀은 이에대한 직접적인 증거로 '내탁공법'을 들었다. 이는 산성을 바깥·안쪽의 이중벽(일명 겹축)이 아닌, 바깥쪽만 쌓은 후 안쪽은 막돌과 점토 등으로 판축(흙다짐)한 것을 말한다.

물론 충주 장미산성이 백제인에 의해 최초 축조되었다는 설은 이번에 처음 등장한 것은 아니다. 지역학계는 장미산성 일대에서 '조족문'(새 발자국) 토기가 집중적으로 발견되는 점을 들어, "백제인이 최초 축조했고, 고구려가 이를 짧은 기간동안 경영했다"고 주장해 왔다. 조족문 토기는 청주 신봉동 백제 고분군에서도 집중적으로 출토되는 토기로, 국내 사학계는 백제를 증거하는 유력한 물증으로 간주해 오고 있다.

반면 중앙 사학계는 이를 수용하는데 매우 인색한 태도를 지녀왔다. 주된 이유로 4~5세기 무렵의 한성 백제는 토성은 쌓을 수 이었지만, 산성을 축조할 정도로 국력이 크지 않았다는 점을 들어왔다.

그러나 중원문화재연구원의 당시 발표는 기존 학설의 수정을 단호히 요구했다. 그렇다면 한성기 백제인들은 어떤 경로를 통해 충북 북부내륙까지 진출했고, 왜 경제적 비용이 엄청나게 들어가는 산성을 축조했는가는 계속 의문부호로 남는다.

◆ 신라 문장가 강수는 대장간집 딸과 결혼= 이런 역사추리가 가능할 것이다. 우선 남한강이라는 물길을 생각할 수 있다. 중세를 넘어 근대 직전까지만 해도 물길, 즉 수운(水運)은 '물류의 고속도로' 역할을 했다. 육로보다 운송시간이 짧고, 보다 많은 물류량을 운반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점이 충주 진출을 가능케 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한성 백제인들은 왜 충주 인근에 거대 산성을 축조했을까. 많은 역사 사례에서 보듯 식량자원 확보를 떠올릴 수 있다. 그러나 충주의 들은 그리 넓은 편은 아니다. 식량자원을 염두에 뒀다면 충북 북부가 아닌 경기 남부에서 남방 경영을 추구해야 했다.

정답은 철(鐵)의 확보에 있지 않았을까. 그러고보니 신라 명문장가이면서 충주에 거주한 강수도 대장간집 딸과 혼인했다.

/ 조혁연

도움말 : 차용걸 충북대교수, 강민식 청주백제유물전시관 학예사.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 지원으로 게재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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