뜨락에 서 있는 나무를 보면서
문득 세월이 흐르고 한두 살씩
나이를 더 먹는 것이 슬픈 일이라는 사실을 새삼 깨닫는다
잎이 청정한 나무처럼
우리가 푸르고 높은 하늘을 향해
희망과 사랑을 한껏 펼 수 없을 만큼
기력이 쇠잔하고 영혼이 늙어서가 아니다
또한 죽음 그림자를 더 가까이 느껴서도 아니다
나이를 먹어가면서
내가 마음속 깊이 믿었던 사람의
돌아서는 뒷모습을 어쩔 수 없이 지켜봐야 하는 쓸쓸함 때문이다
무심히 그냥 흘려 보내는 평범한 일상에서나
혹은 그 반대의 강고한 운동의 전선에서
잠시나마 정을 나누었던 친구나
존경을 바쳤던 옛 스승들이
돌연히 등을 돌리고 떠나는 모습을 지켜봐야 하는 것은
나이를 먹기 전에는 모르던 일이었다
돌아서는 자의 야윈 등짝을 바라보며
아니다 그런 게 아닐 것이다 하며
세상살이의 깊이를 탓해보기도 하지만
나이 먹는 슬픔은 결코 무너지지 않을 벽처럼 오늘도 나를 가두고 있다

- 시집 '기차소리를 듣고 싶다'(창작과비평사, 1996년) 중에서


* 한 해가 가고 있습니다. 곧 모두 한 살 씩 나이를 더 먹게 됩니다. 그 나이를 헤아려보다가 나이의 무게가 가볍지 않다는 생각을 합니다. 이 시의 화자는 나이를 더 먹는 것이 슬픈 일이라는 사실을 깨닫는다고 말합니다.

나이를 먹는 만큼 "기력이 쇠잔하고 영혼이 늙어서" 라거나 "죽음 그림자를 더 가까이 느껴서도" 아니라고 합니다. "믿었던 사람의 / 돌아서는 뒷모습"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친구나 스승 중에 정말 뜻을 같이 하고 어려움을 같이 하며 함께 가기로 한 그 길을 벗어나 약속을 저버리고 돌아서는 모습을 보면서 슬픔을 느낀다는 것입니다.

의롭게 사는 일은 생각처럼 쉽지 않습니다. 아니 하루를 비굴하지 않고 떳떳하게 사는 일도 어려운 일입니다. 사람은 살면서 어쩔 수 없이 현실에 타협하며 삽니다. 특히 나이가 들면서 더 그렇게 되기 쉽습니다. 나이 들어가면서도 자신을 잘 지킨다는 건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그래서 한 사람의 인생에 대한 평가를 할 때 가장 중요하게 보는 것 중의 하나가 만년을 어떻게 보내는가 하는 것입니다. 사회적으로 존경받던 저명한 사람들도 현실적 이익을 앞에 두고 훼절하는 시기가 대개 만년입니다. 나이를 먹는다는 것은 그래서 두려운 일이기도 합니다. 우리도 한 살씩 더 나이를 먹습니다. 우리도 나이 때문에 내가 신념처럼 지니고 있던 것을 포기하거나 돌아서지는 않는지요?

▶김용락 약력
1959년 경북 의성에서 태어났으며 계명대 대학원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시집에 '푸른별', '기차소리를 듣고 싶다' '조탑동에서 주워들은 시 같지 않은 시', 평론집에 '지역, 현실, 인간 그리고 문학' 등이 있으며 대구시협상을 수상했다. 현재 경북외국어대학교 교수로 있다.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 지원으로 게재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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