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들은 걸음을 멈추지 않는다"

# 죽음에 이르는 병

1947년 초겨울. 패전 후 베트남서 도쿄로 돌아온 유키코(다카미네 히데코)는 철썩 같이 믿었던 도미오카(모리 마사유키)에게 '버러지 같이 버려진다.' "고국에 돌아가면 다 정리하고 널 홀가분하게 맞이할게. 막일을 해서라도 둘이 같이 살자"던 사랑의 약속은 사라져버렸다. "전쟁 중에 인내하며 날 기다려준 사람과 독하게 헤어질 수는 없어. 우리는 헤어질 수밖에 없어." 하룻밤을 보내고 그가 돌아가자, 혈혈단신 살아가야 할 많은 날들만 그녀에게 남는다. 무엇보다도 당장 두툼한 옷 한 벌, 이불 한 채 없이 겨울을 나야한다.나루세 미키오 감독의 1955년 작 '부운'의 모든 장면들은 만남에서 시작돼 헤어짐으로 끝나기를 반복한다. 다시는 만나지 않을 것처럼 서로를 할퀴고 냉정하게 돌아서지만 다시 서로는 서로를 찾고, 또 기다린다. 끊어질 듯하면서도 결코 끊어지지 않는, 정말이지 징그럽도록 징한 악연은 유키코의 삶을 내리막길로 내몬다. 양공주가 되고, 자신을 농락했던 사돈에게 기생하다가 사이비 종교 장사로 번 돈을 훔쳐 달아나는 영락의 수순을, 죽음에 이르도록 착실하게 밟는 것이다.그러니 둘은 만나지 않았어야 했다. 베트남 가정부에게 했던 것처럼 중년의 상사가 본국에서 새로 온 미모의 타자수에게 다가올 때, 여자는 얼른 그 시선을 외면했어야 했다. 동반 자살 운운하던 이카호(湖)에서 눈 맞은 여관 여주인의 도쿄 거처에서 도미오카를 만났을 때, 아님 산부인과 침대에서 혼자 덜덜 떨던 때들도 기회였다. 늦었다고 생각한 그 모든 순간들이 최악을 피할 수 있는 최선의 시간들이었던 것이다. # 지상의 방 한 칸
하지만 유키코는 그 어떤 기회도 잡지 않는다. '허세에 변덕쟁이고 소심한데, 술만 마시면 대담해지는 거드름쟁이''인간의 비열함을 잔뜩 감추고 있는' 도미오카가 끝내 다른 여자를 욕망하리라는 것을, '여자를 밟기만 할 뿐'임을 모를 만큼 그녀가 바보는 아니다. 다만 그는 '그런' 인간이고, "여자는 버려지면 또 다시 그런대로 살아가는 것"일 뿐. 그녀는 자신이 오롯이 붙박이던 베트남 밀림 속 사랑의 시간을 지금 이 곳으로 다시 불러오고 싶다. 그럴 수 있으리라는 의지를 굽히지 않을 때에만 그녀는 계속 살아갈 수 있기 때문이다.

미군이 드나드는 허름한 판잣집, 낡고 비좁은 여관방 말고는 비루하고 피곤한 육신을 눕힐 지상의 방 한 칸이 허락되지 않아 두 사람은 늘 거리를 떠돈다. 갈 곳 없던 발길이 마지막으로 닿은 곳은 전기도 들어오지 않고 '한 달 중 35일은 비가 온다'는' 남쪽 끝의 섬 야쿠시마. "우리의 로맨스는 종전과 동시에 사라졌다"며 기억의 소환을 외면하던 도미오카가 다시 울창한 수풀로 들어간다. 그리고 물수건으로 닦아내고 립스틱 곱게 바른 창백한 유키코의 얼굴에서 아름답게 빛나던 베트남 밀림 속 유키코의 모습을 본다.

그렇게 일본의 바깥, 베트남에서 시작된 악연은 일본의 끝, 야쿠시마에서 지루한 무한반복을 끊어낼 순간을 맞는다. 과거를 현실로 끌어내자던 유키코의 강박적 의지와, 그녀만큼 집요하게 과거를 '꿈'이라 부르며 망각하려던 도미오카의 의지는 더 이상 충돌하기를 멈춘다. 하지만 유키코가 죽음의 신을 영접한 이후에야 이루어지는 그 화해란, 대답 없는 유키코 몸 위에 엎어진 도미오카의 통곡이 그런 것처럼 '이미 너무 늦어버린' 것이었다.

"여자는 어디에나 있다"는 얄미운 소리로 유키코를 떠나보냈던 도미오카에게도 이제 살아가야 할 새 털 같은 많은 날들만이 남았다. 그렇다면 그는 '어디에나 있는' 여자들을 모두 외면한 채 '어디에도 없는' 유키코 만을 욕망하며 살아가게 될까. 그건 장담할 수 없지만 "옛날 일이 당신과 내겐 중요해요. 그걸 빼면 당신도 나도 아무 것도 없잖아요?" 묻던 유키코는 결코 패배자가 아니었다는 것만은 확실하다. /박인영·영화 칼럼니스트

# 이 영화는

■ 나루세 미키오(1905~1969)=미조구치 겐지, 오즈 야스지로, 구로사와 아키라와 동시대 감독이었으면서도 1980년대 뒤늦게 진가가 알려진 고전기 일본영화의 '제4의 거장'. 총 89편의 작품 중 1955년 작 '부운'은 "지금까지의 일본 영화 중 최고의 걸작"이란 오즈 감독의 상찬과 함께 명불허전의 멜로 걸작으로 꼽힌다. 당대의 일본 사회와 가정, 인간관계를 냉정한 사실주의자의 시선으로 응시하는 나루세 감독은 '여성의 감독'으로 불리기도 한다. 욕망하는 여성, 치열한 삶의 현장에서 '버텨내는' 여성 등 딸이자 아내인 그들을 깊은 애정으로 그려내는 것이다. 이 점에서 "불행을 택하는 나루세 캐릭터의 정수"라고 할 유키코는, 그의 페르소나이기도 한 다카미네 히데코의 인상적인 연기와 함께 나루세적 세계관을 응축시켜 보여준다.

■ 패전국 일본=패전 후, 피곤과 두려움에 사로잡힌 귀국자들을 보여주는 첫 다큐멘터리 화면은 영화 '부운'에 좀 더 확장된 의미를 부여한다. 끈질기게 베트남이라는 과거를 되새기지 않으려 함으로써 현재의 사랑의 책무를 외면하는 도미오카는 곧 태평양전쟁 유발의 책임으로부터 도피하고 전후 부흥의 책임과 고통을 여성들에게 떠넘긴 패전국 일본/남성의 정체성을 반영하는 것이다. 그래서 도미오카는 패전 전 '좀 이상하긴 해도 꽤 정이 깊은 남자''책임감이 강해 일단 맡으면 일은 틀림없이 하는 남자'에서, 패전 후에는 수컷으로서의 욕망만 강성할 뿐 가장으로서도 연인으로서도 무기력한 남자가 된다. 치마 두른 여자라면 늘 찝쩍거리면서도 걸리느니 무좀과 다래끼요, 떨고 있는 여자에게 외투 벗어주는 것조차 인색한 '영혼이 없는 인간''혼이 빠져나간 시체'인 그는 대체로 무기력하고 무책임한 나루세 영화 속 '찌질남'의 대표라 할 수 있다. 여기에 그들의 사랑이 시작되고 죽음으로써 복원되는 공간이 각각 일본 바깥(베트남)이거나 국경 근처(야쿠시마)였다는 점은 유키코의 잇단 낙태와 함께 패전국 일본의 불능과 불모성(不毛性)을 은유한다.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 지원으로 게재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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