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는 내게 아름다운 길로 가자 했다
너와 함께 간 그 길에 꽃이 피고 단풍 들고
길옆으로 영롱한 음표들을 던지며 개울물이 흘렀지만
겨울이 되자 그 길도 걸음을 뗄 수 없는 빙판으로 변했다.

너는 내게 끝없이 넓은 벌판을 보여 달라 했다
네 손을 잡고 찾아 간 들에는 온갖 풀들이 손을 흔들었고
우리 몸 구석구석은 푸른 물감으로 물들었다
그러나 빗줄기가 몰아치자 몸을 피할 곳이 없었다

내 팔을 잡고 놓지 않았기 때문에
내가 넘어질 때 너도 따라 쓰러졌고
나와 함께 있었기 때문에 세찬 바람 불어올 때마다
너도 그 바람에 꼼짝 못하고 시달려야 했다

밤새 눈이 내리고 날이 밝아도
눈보라 그치지 않는 아침
너와 함께 눈 쌓인 언덕을 오른다
빙판 없는 길이 어디 있겠는가

사랑하며 함께 꽃잎 같은 발자국을 눈 위에 찍으며
넘어야 할 고개 앞에 서서 다시 네 손을 잡는다
쓰러지지 않으며 가는 인생이 어디 있겠는가
눈보라 진눈깨비 없는 사랑이 어디 있겠는가

- 시집 '슬픔의 뿌리'(실천문학사, 2002년) 중에서


* 누구나 인생을 아름답게 살고 싶어 합니다.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손을 잡고 아름다운 길로 가고 싶어 합니다. 그러나 아름다운 길도 늘 아름답지만은 않습니다. 겨울이 오면 그 길도 빙판으로 변합니다. 광활하게 펼쳐진 들판을 거침없이 달리듯 우리의 인생도 그렇게 탁 트이고 길이 환하게 열리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그 들판에 갑자기 빗줄기가 몰아치면 꼼짝 못하고 젖어야 하는 게 인생입니다.

내가 쓰러지면 함께 가던 사람도 넘어지고, 바람이 몰아치면 그 바람이 그칠 때까지 시달려야 합니다. 그러나 팔을 잡고 있었기 때문에 같이 쓰러졌다고 원망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너 때문에 이렇게 되었다고 욕하며 잡고 가던 손을 뿌리치지 않기를 바랍니다.

"쓰러지지 않으며 가는 인생이 어디 있겠습니까" "눈보라 진눈깨비 없는 사랑이 어디 있겠습니까" 쓰러진 몸을 일으켜 줄 손도 내가 잡고 있던 그 손입니다. 눈보라와 진눈깨비를 막아 줄 손도 그 손입니다. 다시 그 손을 잡아야 합니다. 눈보라와 빙판만 계속되는 인생은 없습니다. 눈 쌓인 언덕도 함께 넘어야 덜 힘이 들고 덜 외롭습니다. 그동안 함께 해 주신 독자여러분께 감사의 인사를 올립니다. 앞으로도 일주일에 시 한 편은 읽으며 사는 삶, 정서적으로 풍요로워지는 삶을 사시기 바랍니다.(끝)

▶도종환 약력

1954년 청주에서 태어났으며 '고두미마을에서', '접시꽃당신', '부드러운 직선', '해인으로 가는 길' 등의 시집을 냈다. 신동엽창작상, 올해의 예술상, 현대충북예술상 등을 수상했다. 현재 한국작가회의 사무총장을 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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