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광섭 청주공예비엔날레 총괄부장

새해 첫날부터 눈발이 매섭게 휘날린다. 푸른 솔숲이 하얗게 새 옷으로 갈아 입으니 설국이 따로 없다. 늘 푸르던 솔잎향도 잠시 숨소리를 멈추었다.

이름 모를 새 한 마리 푸드득, 하얀 솔잎위에 내려 앉아 눈발에 날개깃을 적신다. 저 산 너머 햇살까지 쏟아지니 세상은 온통 하얀 눈, 밝은 빛이다. 맑고 고운 서정이 내 몸속으로 밀려온다. 잠시, 가던 길을 멈추고 하늘 한 번, 들녘 한 번 둘러보며 하얀 솔잎의 아름다움에 빠져본다. 새롭다.

늘 보던 대자연도 새롭고 내 마음가짐도 단아하다. 지금, 저 산 정상에 서 있는 하얀 솔숲처럼 반듯한 그 모습 그대로 살리라. 이 생명 다하는 날까지 청정한 대자연의 향기로움과 직립의 위대함을 잊지 않고 오달지고 마뜩하게 살리라.

신기한 것은 한 해가 바뀔 때마다 이처럼 새로운 각오와 새로운 마음, 그리고 새로운 미래를 꿈꾼다. 뭐라도 다 할 수 있을 것 같고, 누군가를 열렬이 사랑할 것 같으며, 용서하고 배려하는 인간미가 내 몸 안에 가득 들어와 있는 것 같다. 생명과 열정과 사랑과 우정이라는 DNA가 흐르고 있으니 경인년 한 해도 만사형통할 것 같다.

그러고 보니 가고 오는 모든 것은 아름답다. 추억이 맛있고 그리우며 정겨운 것도 이 때문이다.

금융위기에서부터 코펜하겐의 기후온난화 문제, 그리고 기아와 테러에 이르기까지 지난 한해 지구촌을 뜨겁게 달구었던 일들이 주마등처럼 스쳐간다. 안으로는 또 어떠한가. 세종시 문제에서부터 4대강 정비사업, 북핵과 경제위기, 크고 작은 사건과 사고에 이르기까지 단 하루도 편안한 날이 없었다.

게다가 신종플루 패닉 현상이 발생하면서 국제행사가 취소되고 생활풍습까지 변하는 등 어수선한 한 해였다. 40일간 비엔날레 행사장에서 행여나 신종플루 환자가 발생하지는 않을까 노심초사 하고 방역과 위생에 진땀 흘리던 일을 어찌 잊을 수 있겠는가. 이처럼 긴박하고 아슬아슬한 삶의 연속이었지만 되돌아보니 모든 것들이 아름답고 소중한 추억으로 남아있다.

지나간 일들이 모아지면 추억이 되고, 그 추억의 파편들이 다시 모여 거대한 역사의 물줄기가 된다. 마치 작고 보잘 것 없는 조각들이 모여 오달지고 마뜩한 조각보가 만들어 지며 예술작품으로 승화되는 것과 다르지 않다.

지나간 일들이 아름다운 추억이라면, 다가올 일들은 기다림과 설렘의 미학이라 할 것이다. 그 누구도 한 치 앞을 예단할 수 없는 긴장과 불안, 그 속에 싹트고 있는 희망이라는 씨앗, 그리고 그 씨앗이 자라 꽃이 피고 열매를 맺는 순간의 숨 막히는 흥분 때문에 빙벽에 걸린 자일처럼 팽팽한 삶을 살면서도 생명에 대한 외줄을 놓지 않는 것이다.

경인년 한 해도 결코 쉽지 않은 일들이 내 삶과 내 삶의 주변을 오고 갈 것이다. 힘들 때마다, 고비가 닥쳐올 때마다, 지난날의 아름답고 소중했던 추억의 시계바늘을 되돌려 보자. 삶의 지혜가 무엇인지, 무엇으로 살아야 할 것이지, 한 점 부끄럼 없는 소중한 생명으로 남을 수 있는지 묻고 또 묻자. 서두르지 말자.

아래 위를 둘러보고 배려하며 사랑하자. 가슴 따뜻한 사람이 되자는 것이다. 도시의 협곡에서 방황하지 말고 대자연과 호흡하며 인간 냄새 나는 삶을 만들어야 한다.

답답하고 어수선한 회색도시, 눅눅하고 구질구질한 인생의 협곡 어딘가에서 방황할 게 아니라 생명의 숲에서 작지만 소중한 나만의 추억을 만들어보자. 여기에 하나 더, 시대의 화두인 통섭과 융합을 실천하고 창조경영의 리더가 되면 좋겠다. 갈등과 대립, 분열과 이기의 탈을 벗고 인간미 물씬 풍기며 개성 넘치는 사람이면 더욱 좋겠다.

코끝에 맵싸한 겨울바람이 와 닿는다. 다시, 신발 끈을 조여매야겠다. 지난 일들의 추억을 가슴에 묻고 미지의 숲을 향해 아름다운 걸음을 시작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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