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즈넉한 길 걸으며 마음과 몸 정갈하게

올해 설 연휴는 유독 짧아 다소 아쉽지만 명절은 여전히 즐겁다. 짧은 설명절 연휴에 지친 피로도 풀고 얼마남지 않은 봄방학을 이용해 가볼만한 가까운 곳은 없을까.

특히 설로 인해 귀성과 자녀들이 자녀들의 개학 등으로 여행 계획이 부담이 돼 평소 관심은 있었지만 쉽게 가보지 못했던 주변의 문화유적을 찾아보는 것은 또다른 재미.

고즈넉한 산사 등으로 걸어가는 기분은 몸과 마음을 정갈하게 다질 수 있는 기회가 되고 올한해 계획했던 일들을 다시한번 마음속으로 깊이 다짐하는 명상의 시간도 가질 수 있다. 또한 앞으로 얼마남지 않은 봄방학에 자녀들과 함께 문화유적 체험학습의 효과와 하루정도 코스로 짧은 연휴를 이용할 수 있어 시간과 비용을 절약할 수 있다.

오랜만에 만난 가족, 친지들과 함께 여유롭게 차례를 지낸 뒤에는 무엇을 할까 고민말고 주변으로 눈을 돌려 선조들의 얼을 그대로 느낄 수 있는 문화유적 테마로 명절을 즐겨보자.

# 안심사 영산회괘불탱 남이면 사동리

괘불(掛佛)이란 사찰에서 큰 법회나 부처님 오신 날과 같은 불교행사가 있을 때 야외에 걸어 예불할 수 있도록 만들어진 불화이지만 전국적으로 남아있는 것이 드물다.

안심사에 전해지는 이 괘불은 윗부분 일부에 약간의 손상이 있으나 전체적으로 보존 상태가 양호하고 색상도 거의 원상을 간직하고 있다. 불화의 내용은 석가여래를 가운데 모시고 그 주위에 불·보살과 제자들로 둘러싸여 있는 모습을 그리고 있다.

괘불의 하단에는 '순치 9년 임진 4월일'이라는 제작연대가 쓰여 있어 조선 효종 3년(1652)에 제작됐음을 밝혀주고 있으나 화공의 이름은 기록되지 않았다.

괘불을 그린 바탕은 삼베로 크기는 가로 486.5cm, 세로 741cm이며, 크기는 가로 462cm, 세로 627cm이고 본존상의 높이는 372cm이다.

지난 2003년 보수됐으며 화강암으로 조성된 괘불대를 대웅전 앞에 설치해 부처님 오신 날 등 중요한 행사 때 괘불을 걸어 공개하고 있다.


# 계산리 5층 석탑 가덕면 계산리

피반령 북쪽 기슭에 자리 잡은 계산리 절터에 유일하게 남아있는 석탑이다. 절터는 모두 없어져 논밭으로 변하고 이 오층석탑만 옛 자리를 지키고 있다.

단층으로 된 기단(기단)과 5층의 몸돌은 원형대로 있으나 맨 위의 상륜부(상륜부)는 모두 없어졌는데 전체적으로는 보존상태가 양호한 편이다. 각층의 몸돌은 문양이 조각되지 않은 단순한 형태로서 1층은 4개의 면석(면석)으로 이뤄져 있으나, 2층 이상은 1개의 몸돌로 이뤄져 있다. 위아래 지붕들의 체감률이 정연해 탑이 전체적으로 안정된 느낌을 주고 있으며 우수한 솜씨를 보여주고 있다.

제작 시기는 고려 초기로 추정되고 있으며, 현재 석탑의 전체높이는 5.65m인데 없어진 상륜부까지 합치면 8m가 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 보한재 영정 가덕면 인차리

이 영정은 신숙주의 초상화다. 신숙주는 조선 초기의 학자이며 호는 보한재, 희현당, 본관은 고령이다. 세종 20년(1438)에 진사에 들었고 이후 여러 요직을 거치면서 세조를 도와 영의정에까지 벼슬이 올랐다.

그는 또한 한글을 창제하는 데 공이 컸다. 구봉영당에 전해지는 이 영정은 원본으로 평가받고 있다. 특히 영정속의 흉배 문양으로 보아 세조 원년(1455) 에 그려진 것으로 추정된다.

모시 바탕의 전신상은 조선 초기 공신상의 전형적인 모습을 보여준다. 가슴부분 무늬는 관복에 직접 금박 혹은 자수하였는데 명나라 양식을 따랐으며 구름 아래 목단과 금계를 수놓았으니 당시의 복식제도로 미루어 정 2품직을 나타낸 것으로 짐작된다.


# 이항희 가옥 남이면 고은리

이 가옥은 철종 12년(1831)에 지은 안채와 20세기 중반에 지은 사랑채로 구성된 전통한옥이다.

평면적인 구성은 안 공간과 바깥 공간으로 이뤄져 있다. 안 공간은 'ㄱ'자 모양의 안채와 그 앞의 一자 행랑채 및 동쪽의 곳간채, 그리고 서쪽의 광채로 연결돼 있다. 바깥공간에는 행랑채 동쪽에 배치된 사랑채가 있으며 안채는 홑처마에 합각지붕 형태의 목조기와집으로 돼 있다.

이 가옥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을 든다면 전통적인 조경을 꼽을 수 있다.

행랑채 동쪽 끝에 시설된 대문을 들어서서 가운데 마당에 이르고, 일각대문인 가운데 문을 거쳐 안채에 이르는 외부 공간의 구성과 안마당의 모과, 향나무와 뒤꼍의 감나무 등이 전통적 기법에 따라 배치돼 있다. 또한 안채의 건축연대가 명확하다는 점과 함께 건물구조에 있어서도 민가의 방식을 많이 따랐다는 것도 눈여겨 볼만하다.

#유계화 가옥 부용면 부강리

이 가옥은 부강리 마을이 내려다보이는 위치에 정남향으로 자리잡고 있다. 조선 고종 3년(1866)에 지은 전통 한옥으로 우리나라 중부지방의 전형적인 양반주택이다.

평면적인 건물의 배치는 'ㅁ'자 모양으로써 사랑채는 한단 낮게, 안채는 한단 높게 각각 'ㄷ'자 모양의 건물이 맞물려 있는 고전적인 방식을 따랐다. 안채의 평면구성은 우리나라 남부지방의 방식이 가미된 형태로서, 안방을 동쪽에 두어 안마당에 만나고 건넌방은 서쪽에 배치하여 뜰을 향하여 안부엌이 이들과 '一'자로 놓이는 구조로 돼있다.

사랑채는 중앙에 사랑방을 두고, 서쪽에 조그만 대청을 두었는데 이는 외부 손님의 접대보다는 이 집에 사는 사람의 주거공간으로 활용하기 위한 공간구성이라 할 수 있다.

중문은 서쪽 측면에 두었고, 동쪽에는 후원으로 통하는 작은 출입문을 두었다. 사랑방에는 행랑채를 두는 것이 일반적인 형태이나 이 가옥에서는 보이지 않으며 다른 외부공간도 많이 변형돼 있다.

#문산관 문의면 문의문화재단지

문산관은 조선시대 문의면의 객사다. 관이란 고려와 조선시대에 각 고을에 있던 관사로 중앙에서 내려온 사신의 숙소로도 사용하던 곳이다.

조선시대에는 이곳에 전패를 안치하고 지방의 관리들은 초하루와 보름날에 임금이 계신 대궐을 향하여 절을 하는 의식을 거행했다. 때문에 객사 건물 기둥 중앙부의 모습은 동헌보다도 웅장한 것이 특징이다.

문산관은 목조기와집 건물로 정면 10칸, 측면 3칸의 2익공 집인데 정당은 정면 3칸, 측면 3칸이고 우익실은 정면 4칸, 측면 3칸이며 좌익실은 정면 3칸, 측면 3칸이다.

이 건물의 정확한 창건연대는 알 수 없고 단지 조선 현종 7년(1666)에 현령 이명하가 옮겨 세웠다는 기록이 있으며 지붕의 암막새기와에 새겨진 글씨로 보아 조선 영조 4년(1728)에 한차례 고친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1979년에는 대청댐이 완공되면서 문산관이 수몰지역에 있게 돼 문의향교 옆으로 옮겼다가 1997년에 다시 문의문화재단지로 이전해 옛 모습대로 복원됐다.

#월리사 대웅전 문의면 문덕리

월리사는 신라 무열왕때 의상대사가 창건하고 이곳에서 수도 정진해 성불했다.

대사가 이 절에 있을 때 하늘의 달빛이 해와 같이 밝게 비추는 것을 보고 감탄해 절의 이름을 월리사라고 명칭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

월리사 대웅전은 조선 효종 8년(1657)에 명현당 원학대사가 다시 세운 건물이다. 처마 끝의 암막새기와에 양각된 글씨로 보아 영조 6년(1730)에 또 한 차례 고친 것으로 보인다.

#손병희선생 유허지 북이면 금암리

이곳은 독립운동가로서 3·1운동 당시 33인 중 한 분인 의암 손병희(1861~1922) 선생이 출생해 자란 생가다.

선생이 태어난 생가는 정면 4칸, 측면 1칸반의 초가집으로 1971년에 보수됐다. 1961년에 탄신 100주년을 맞아 세운 유허비가 있으며 2000년 3월 1일에 의암영당과 의암기념관을 개관했다.

#단재 신채호 사당 낭성면 귀래리

단재영당은 일제 때의 독립지사이며 사학자이며 언론인이었던 단재 신채호(1880~1936) 선생을 기리기 위해 1978년에 그의 영정을 봉안하고 세운 영당으로 그의 묘소 바로 앞에 있다.

영정은 1981년에 한광일이 그린 전신교의좌상이다.

영당은 정면 3칸 측면 1칸 겹치마 맞배지붕의 목조기와집인데 내부는 통칸 마루방에 분합문을 달고 앞마루를 놓았으며 '단재영각' 이라는 편액을 걸었고 사당 앞에 '정기문'이라 이름붙인 삼문을 세우고 둘레에는 담장을 둘렀다.

묘소는 선생이 동방무정부주의자연맹 활동을 하다가 체포돼 복역하던 중 1936년 2월 21일에 여순 감옥에서 순절함에 따라 선생이 어린시절에 살던 옛 집터에 안장한 것으로 묘정에는 한용운, 오세창, 선백우 등이 세운 묘표와 1972년에 세운 사적비가 있다. / 박재광

▲유계화가옥 사랑채 이 가옥은 부강리 마을이 내려다보이는 위치에 정남향으로 자리잡고 있으며 조선 고종 3년(1866)에 지은 전통 한옥으로 우리나라 중부지방의 전형적인 양반주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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