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합리적 시각 갖기

흔히, 한글은 과학적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한글이 과학적이라는 것은 무엇을 말합니까. 어떤 사람은 '한글의 모양이 발음기관을 본 뜬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관련된 모양을 본떴다고 해서 과학적이라고 하면 상형문자는, 특히 한자는 과학적이라고 말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렇지만 중국인들이 사용하는 컴퓨터 자판을 보고나면 한자가 과학적이라는 말에 동의하고 싶지 않을 것입니다.

한글의 과학성은 배우기에 쉽고, 사용하기에 편안하다는 점에 있습니다. 쉽고 편안한 것이 과학적이라는 말은 아닙니다. 쉽고 편안함을 만들어내는 특성이 한글에 있다는 것이고 그것이 과학적이라는 말입니다. 자음과 모음이 만들어내는 초성 중성 종성의 메카니즘은 한글을 세계에서 가장 쉽고 편안한 문자로 만들었습니다. 그러므로 한글은 과학적이라고 할 때는 '귀납'과 같은 기준은 적용되지 않습니다. 이 때는 '유용성' 혹은 '편리성'정도의 기준을 받아들일 수 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은 과학은 귀납과 반증의 두 가지 기준을 갖추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듯합니다. 귀납은 다들 알고 있는 것입니다. 즉, A(1, 2...)라는 구체적인 사건의 누적으로부터 A를 도출하는 것이 귀납입니다. 그런데 귀납에는 피치 못할 문제가 있습니다. 그것은 흔히 '귀납적 비약'이라고 불리는데요, 예를 들어, 쥐꼬리를 100대동안 잘랐는데도 또 쥐꼬리가 나는 것을 보고 '후천적으로 변화된 쥐꼬리의 형태는 유전되지 않는다.'는 결론을 도출했다고 해봅시다. 다음과 같은 반론이 가능해보이는군요. '101대를 잘랐으면 혹 유전되었을지도 몰라.'라는 반론 말입니다. 구체적인 사실과 일반화된 이론과는 격차가 있고 그것은 사실의 무한한 누적으로는 극복될 수 없습니다.

이 때문에 등장한 것이 포퍼의 '반증주의'라는 것입니다. 즉, '귀납→과학'이라고 하면 과학은 극복될 수 없는 비약위에 놓이게 되므로 차라리 '반증되지 않았으면 타당성을 인정한다'는 기준 즉, '반증가능성'을 과학성의 필요조건으로 삼자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위와 같은 사례에서 반증주의자는 다음과 같이 답할 수 있습니다. '좋아, 그렇지만 후천적인 변이가 유전된다는 증거를 가져와봐. 그러면 이 가설을 포기하지. 그렇지만 그 전까지는 우리는 이 가설을 타당한 것으로 받아들이고 있을 거야. 그리고 이 가설은 반증가능하기 때문에 과학적이야'라고 말이죠.

그렇지만, 가설의 설정과 폐기도 사람이 하는 일입니다. 때문에 반증된 이론이 바로 폐기되는 것은 아닙니다. 반증되었다고 해도 본래의 가설을 주창한 이는 상대의 반증이 잘못되었다거나 자신의 가설을 보완하거나 하는 식으로 본래의 가설을 견지하려고 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식으로 상당한 시간을 버티는 것이 임계점에 달하면 이제 가설은 폐기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것이 바로 쿤이 '패러다임'이라는 개념으로 말하고자 했던 것입니다.

포퍼와 쿤은 모두 당시의 주류이론을 부정하면서 사고를 진행시켰고 그 결과 인류는 보다 합리적인 시각을 지니게 되었습니다. 이처럼 인류에게 새로운 시각을 제공해주는 인물의 첫 번째 시작점은 주어진 것을 의심하는 눈입니다. 창의적인 도약을 꿈꾸는 집단은 학생들의 그런 눈을 용납하고 받아들여 주어야 하는데, 이 점은 종종 곡해되는 것으로 보입니다. 자율은 기강위에서야 바르게 작동하는데 사람들은 기강은 반드시 자율을 억압하므로 창의성을 유도하기 위해서는 기강을 약화시켜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정말로 그럴까요. 이 문제는 다음 지면에서 생각해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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