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유의 길

안동에는 낙동강 상류를 따라 청량산으로 이어지는 '퇴계 오솔길'이 있습니다. 아마, 그 길을 걸으면서 한국 유학사에 큰 영향을 끼친 고봉 기대승과의 서신을 고민했을 가능성도 있으니, 그 곳을 철학자의 길이라고 부를 수도 있을 듯합니다. 그런데 교토에는 이름이 '철학의 길'(哲學の道)인 철학자의 산책로가 있습니다. 이 길은 일본철학을 대표하는 인물인 니시다 기타로가 사유하며 걸었던 길입니다.

수양과 지식을 위한 공부를 관통했던 이 독특한 인물의 대표작은 젊은 날에 쓴 '선의 연구'(善の硏究)입니다. 이 책의 서두에는 그의 사상을 함축적으로 보여주는 구절이 있습니다. '경험은 사건들을 정확하게 있는 그대로 안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경험을 말하면서도 생각을 덧붙이기 때문에, 여기에 사용된... 말은 생각이나 사고가 조금도 가미되지 않은 진정한 경험 그 자체의 상태를 뜻한다. 예를 들어, 어떤 색깔을 보거나 어떤 소리를 듣는 바로 그 순간을 의미한다.' 禪家의 각성을 떠올리게 하는 이 구절은 주객의 분리로서는 도달할 수 없는 超認識의 경지를 말합니다. 그렇지만 그것은 동양사유에 익숙한 이들에게는 친근한 것입니다. 니시다가 말 그대로 일본철학을 대표하게 된 까닭은 단순히 서양의 철학을 말하는데서 그치지 않고 스스로 철학을 함으로써 동서양을 회통시켰기 때문입니다.

용기와 전진은 참으로 존경할 만한 촌스러운 것인데, 우리는 현재의 교토에서도 같은 현상을 발견합니다.

뉴스위크지의 2008년 2월 25일자 기사에서는 일본 내의 다른 기업들과 달리 닌텐도가 성공적인 혁신을 이뤘던 까닭 중 하나로 그 회사가 일본의 중심인 도쿄가 아닌 교토에 있는 것을 들고 있습니다. 일종의 주변성, 다름을 혁신의 근거로 말한 것입니다. 확실히 중심부에 있으면 사회의 표준적인 성공을 얻는 데는 유리합니다. 그러나 주변성과 그로부터 나오는 다양성이 없으면 그 사회는 새롭게 도약할 수 없습니다.

한국의 지역교육은 수도권의 대학에 지역출신의 인재들을 보내기 위한 목적에 전적으로 매몰되어 왔습니다. 이런 교육의 문제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여기서는 두 가지만 들어 보겠습니다.

먼저, 지역에서 배출한 인물이 지역에서 보내준 돈으로 서울의 학교를 다니다가 졸업하고 지역에서 보내준 돈으로 정착하고 그곳에서 겨우겨우 붙어먹으면서 세월을 보내다 보면 대개는 서울사람이 됩니다. 즉, 이런 교육이 지역의 인재를 지역에서 키워서 지역에서 써먹는 것 보다 지역의 이익에 더 도움이 된다는 증거는 없다는 것입니다.

둘째, 그것은 다양성에 반합니다. 서울교육이 대한민국의 교육을 대표하게 되면 그것을 벗어난 것은 틀린 것이 됩니다. 그렇지만 서울을 중심으로 행해지는 대학교육은 대한민국의 초중고 교육에 비해서 현격히 떨어집니다. 초중고학생들의 올림피아드 성적과 반비례해서, 서울대의 순위는 한국의 피파랭킹보다 높지 않을 것입니다.

며칠 후에는 학력성취도 평가가 있는 모양입니다. 충북에서는 그로 인한 학업의 강도가 타지역보다 세다고 하는데 어떤지 잘 모르겠습니다. 혹시 그것을 대비하기 위해 자체적인 일제고사도 보나요? 만약 그렇다면 엉뚱한 짓을 하는 것입니다.

전국을 획일적인 기준으로 평가하는 일제고사는 반지역적이고 반창의적입니다. 교육이 다양성과 창의성을 추구해야 하는 것이라면 그것은 특히 지역교육이 아닙니다. 최소한 '서울로 보내기 교육'이 아닌 '지역교육'이라고 불리기 위해서는 지역소재의 대학과 협의하여 지역출신 학생들의 합격률을 어느 정도 확보해야 하고, 지역출신학생들의 창의력을 신장할 수 있는 전형방법을 협의해야 하며, 그런 바탕위에서 창의 프로그램을 운영할 생각을 해야 하고, 지자체와 협의하여 그런 교육의 바탕이 되는 지역의 문화수준을 높이기 위해 석학세미나를 주기적으로 열어야 하며,... 뜻이 있으면 할 일이 많고 욕심이 많으면 피할 일이 많은 법입니다.

다음 주에는 철학자의 길에 대해서 이야기 하고 싶습니다. 충북에도 철학자의 길이 있으면 좋겠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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