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사진이 있는 풍경 〈7〉

라이카 카메라는 내 눈의 연장이었다. 그리고 그것을 발견한 때부터 지금까지 결코 내 곁에서 떨어뜨려 둔 적이 없다. 강한 긴장감으로 카메라를 움켜잡을 준비를 하며, 하루 종일 거리를 헤매고 다녔다. 그리고 삶을 "가두기"로 결심했다. 생활 현장에서 삶을 담아내는 것. 무엇보다도 한 장의 사진 속에, 즉 내 눈앞에서 펼쳐지는 삶의 현장에서 삶의 본질 전부를 담아내고 싶었다. / 앙리 카르티에-브레송


델마와 루이스의 여행 가방에는 폴라로이드 카메라가 들어있고, 인수와 서영에게는 휴대폰 카메라만 있다. 출발했던 곳으로 돌아오지 못할 델마와 루이스에게는 현상과 인화의 여유가 허락되지 않았으며, 인수와 서영에게는 꿈꿔 볼 미래가 주어지지 않았으니까. 하지만 '특별한 선물' 폴라로이드 카메라는 얼굴도 모르는 이를 광장으로 끌어낸다. 그렇게 '순간'과 '영원'을 잇는 스펙트럼 어디쯤에 사진들이 놓인다.



"계속 가는 거야 … 가자!"
# 18. '델마와 루이스'(1991, 리들리 스코트)

손님들의 자잘한 요구에 미소로 답하면서 틈틈이 담배를 무는 웨이트리스의 일상. 고작 1박2일 주말여행조차 남편 눈치 보며 운도 떼지 못하는 가정주부의 처지. 루이스(수잔 서랜든)와 델마(지나 데이비스)는 그 모든 지루한 것들에 잠시 안녕을 고한다. 단정하고 능숙하게 쌌거나 서랍 속 물건을 모조리 우겨넣은 짐들을 차에 싣고 다정하게 폴라로이드 카메라 앞에 선 델마와 루이스. 날아갈 듯한 흥분과 기대가 고스란히 담긴 폴라로이드 사진 한 장과 함께 드디어 여행이 시작된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이들의 '정말 끝내주는 휴가'에는 운이 따라주질 않는다. 그저 한 잔의 마가리타, 흥겨운 음악과 함께 좀 즐기려고 했을 뿐인데 '더 빨리 안 죽은 게 이상할 뿐'인 남자의 공격을 시작으로 헤어날 수 없는 수렁에 빠진다. 이런 끔찍한 순간을 상상조차 할 수도 없었던 시간으로 돌아갈 기회가 번번이 사라져버리면서 둘은 '무장한, 매우 위험한 용의자'가 돼 위협과 적대의 세상을 횡단하며 달린다.

그 끝이 어딘지 모를 그들의 질주/도주는 그러나 단지 '돌이킬 수 없는' 것만은 아니다. 무시와 거친 욕설뿐인 남편 데릴 없이 처음 떠난 여행에서 델마는 '처음으로 확실하게 깨있는 느낌'을 갖는다. 모든 게 달라 보이는 느낌, 무언가 새로운 게 기다리고 있는 것 같은 느낌. 그러니 뭔가를 이미 건너왔고, 돌아갈 수도 없다. 세상이 자신들의 말을 들어주지도 믿어주지도 않을 것임을 몇 년 전 텍사스에서 깨달았던 루이스 또한 그들에게 총을 겨눈 남자들에게 이야기를 들어달라고 애원할 생각은 없다.

그래서 둘은 달리기를 멈추지 않는다. 그랜드 캐년의 장엄한 어둠과 새벽의 숭고한 침묵을 만났으니, 무엇보다도 서로에게 '최고의 친구'가 함께 했으니 여행의 '끝'은 어떻게 마무리돼도 좋으리라. 짧은 입맞춤을 나눈 후 두 손을 꽉 잡은 델마와 루이스의 차가 허공으로 날아오른다. 검게 탄 피곤한 얼굴, 마구 헝클어진 머리의 둘은 서로를 마주보며 웃는다. 그 미소가 바람에 날아가는 폴라로이드 사진 속 행복한 웃음과 다른 듯 닮았다.



"만나서 얘기해요, 우리"
# 19. '접속'(1997, 장윤현)

모든 건 그 '천사병' 때문이었을 것이다. 자꾸만 거절당하는 어떤 남자에게 굳이 폴라로이드 카메라를 추천했던 때처럼 수현(전도연)은 채팅 창 너머로 전해오는 동현(한석규)의 쓸쓸함에 그만 거짓말을 하고 만다. 실망시키고 싶지 않은 맘에 동현이 애타게 찾는 옛 연인을 알고 있다고 한 것이다. 그리고 곧 후회한 수현은 사실을 밝힌다. 동거하는 희진(강민영)은 "어차피 통신인데 누군지 알 게 뭐냐"며 대수롭지 않아 하지만 그럴 수야 없다. 가뜩이나 아물지 않은 그의 상처를 더 아프게 했으니 어떻게 미안함을 표해야 할까.

수현이 얼굴도 모르는 타인의 상처에서 쉽게 눈길을 거두지 못하는 건 아마도 그 자신의 처지 때문이었을 것이다. 무척 따뜻하고 기분이 좋아지는 기철(김태우)의 웃음에 설레는 가슴을 숨기느라 눈물조차 말라버린 시간은 너무 잔인하다. 그래서 더욱 벨벳 언더그라운드의 음반을 찾고 미안하다는 메일을 보내며 어떻게든 그의 상처를 다독여주고 싶은 것이다.

그리고 3장의 폴라로이드 사진으로 바위처럼 꿈쩍 않던 동현의 냉정한 마음을 움직인다. 굵은 사인펜으로 '미안해요'라 적은 네 글자와, 수현이 직접 쓴 편지지를 찍은 폴라로이드 사진과 카메라를 우편으로 받은 동현은 수현과 채팅을 하며 조금씩 자신의 이야기를 건넨다. 허망하기 짝이 없는 수현의 애달픈 짝사랑을 그만둘 것도 권한다. 그리고 얼마 뒤 방송국을 그만 둔 동현은 자신의 셀카를 찍어 수현의 사진 3장과 함께 나란히 벽에 붙여놓는다. 그 얼굴이 'Pale Blue Eyes'의 그늘에서 조금쯤은 벗어난 듯 밝아 보인다.

'오래 기다리지 않아서 좋고/늘 약간 흐릿해서 좋고/쉽게 구겨지지 않아서 좋고/한 장 밖에 없어서 좋은' 폴라로이드 사진은 '끝내 어긋나는 만남'에 대한 동현의 두려움에 '만나야 하는 사람은 반드시 만난다'는 수현의 믿음을 어렵게 연결한다. 어두운 기억과 상실의 상처를 피해 이 땅을 떠나려했던 동현의 발길을 돌려 세우며 피카디리 광장에서 두 사람은 드디어 만나는 것이다. 끊어질 듯 끊어지지 않는 인연은 그렇게 이어지며 이야기는 계속된다.



그들에게 허용된 사진
# 20. '외출'(2005, 허진호)

느닷없는 교통사고 소식을 듣고 달려간 병원에서 인수(배용준)와 서영(손예진)이 마주친다. 의식 불명의 아내 곁에 있던 낯선 남자의 아내. 그리고 남편과 함께 구급차에 실려 온 낯선 여자의 남편. 만나지 않았으면 좋았을, 만나지 않았어야 했을 끔찍한 악연의 두 사람은 경찰서에서 만나 파란 바구니 속 배우자들의 물건을 각자 골라낸다. 그리고 자신의 아내 것도, 자신의 남편 것도 아닌-아니어야 했을 낯선 물건들 앞에서 머뭇거린다.

아내와 남편이 깨어나길 원하는 건지, 깨어나 비루하게 꺼낼 변명을 기다리는 건지 혹은 아예 깨어나지 않기를 바라는 건지 알 수 없는 시간이 흐르면서 둘은 자꾸만 마주친다. 중환자실에서, 묵고 있는 숙소에서, 근처 식당과 수면제 사러 간 약국에서. 그리고 자신의 아내와 남편이 그랬던 것처럼 나란히 차를 타고 교통사고 피해자 상가에 조문을 다녀온다. 자신의 아내와 남편이 그랬던 것처럼 봉변도 함께 당한다.

그러다가 둘은 함께 밤을 보낸다. "우리 사귈래요? 둘이 기절하게?", 술김에 서영이 농담처럼 건네긴 했지만 치밀한 복수 시나리오에 따른 행동은 아니었다. 굳이 말하자면, 달리 할 일이 없었다고나 할까. "차라리 죽지 그랬니?" "개새끼", 저주와 복수의 일념으로 날을 세우기에도, 참담함으로 서럽게 울기에도 지루한 시간들이 지나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 함께 만나 밥 먹고 술 먹고 산책도 하면서 그저 무료하게 스쳐 지나가는 끔찍한 시간을 함께 겪는 것 말고 다른 선택이 없다.

그러면서 둘은 간혹 자신들의 처지를 잊는다. 모든 평범한 연인들처럼 상대방 손의 온기에 마음의 추위를 달래고, "어떤 계절 좋아해요?" "걷는 거 좋아해요?" 같은 심심한 대화를 나누고,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처럼 방심한 듯 웃는다. 그래서 함께 밤을 보낸 다음 날 바닷가를 걸으며 서영이 묻는다. "우리 사진 찍을래요?" 작은 휴대폰 액정 속에서 둘은 이제 막 사랑에 빠진 연인처럼 조용하게 웃는다. 하지만 둘이 함께했던 시간을 증명하는 사진은 데이터로 잠시 저장됐다가 어떠한 형체도 남기지 못하고 삭제될 것이다. 만나지 않았어야 했던 둘의 인연도 딱 거기까지다. / 박인영·영화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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