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을 열며-정문섭 〈논설위원〉



踏雪野中去(답설야중거) 不須胡亂行(불수호난행)

今日我行跡(금일아행적) 遂作後人程(수작후인정)

'눈 덮인 산길 걸어갈 때 행여 이리 저리 함부로 걷지 마라. 오늘 내가 남긴 발자국이 마침내 뒷사람의 길이 되리니.'

서산대사의 선시(禪詩) 중 일부다.

서산대사의 이 시는 새로운 일을 시작하거나 결단을 내려야 할 시점에서 읽으면 많은 여운을 안겨준다.

그래서 유명인사들은 인생의 중요한 기로에 섰을 때 이 시를 곧잘 인용하며 자신의 심경을 피력하곤 했다.

LIG손해보험 구자준 회장은 이 시가 가진 가장 큰 가치로 선구자적 정신을 꼽는다.

그는 말한다. "세계 최고봉인 에베레스트는 1953년 영국인 에드먼드 힐러리 경이 처음으로 정복했지만 에베레스트는 여전히 인간의 발길을 좀처럼 쉽게 허락하지 않고 있다."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은 일 년에도 수 십 명의 산악인들이 에베레스트 정상에 깃발을 꽂을 수 있게 된 것은 바로 힐러리 경이 먼저 남긴 발자국 덕분이라고 설명한다.

구 회장은 기업의 최고 경영인들도 눈 덮인 들판에 발자국을 남기는 사람, 험준한 산 봉우리를 오르며 '루트'를 만들어내는 사람과 다를 바 없다고 비유한다.

기업인 CEO이면서도 히말라야와 남극, 북극 등 해마다 극지 탐험에 나서기로 유명한 그는 '남극횡단 그린원정대' 원정 대장으로 참여하여 새해 연초부터 원정대를 진두지휘할 예정으로 있다.

서산대사의 선시는 올해 정치권에서도 종종 회자(膾炙)됐다.

2010년 6월29일 세종시 수정안 본회의 표결을 앞두고 원내대책회의를 주재하던 민주당 박지원 원내대표는 김대중 전 대통령으로부터 받았다는 서산대사의 선시를 낭독한 뒤 "백범 선생도 즐겨 쓴 이 휘호에 우리의 길이 있다."며 세종시 수정안에 반대표를 던져줄 것을 촉구했다.

이명박 대통령 역시 당선자 시절인 2008년 1월17일 불교 지도자들을 만나 종교화합을 통한 사회통합을 강조하는 자리에서 "오늘 내가 걸어간 발자국이 뒷사람의 이정표가 된다는 서산대사의 말씀은 지도자가 반드시 되새겨 볼 말씀"이라고 거론한 바 있다.

세밑인 지난 25일 이번에는 '2010 KBS 연예대상'을 받아 연말을 멋지게 장식한 코미디언 이경규씨가 서산대사의 선시를 인용하여 "하얀 눈밭에 내가 디딘 발자국이 후배들을 인도할 수 있는 길이 됐으면 한다. 무소의 뿔처럼 달려가겠다."는 수상소감을 피력해 눈길을 끌었다.

이씨의 이번 수상은 그가 오랜 기간의 슬럼프를 딛고 <남자의 자격>으로 시청자들 앞에 컴백하면서 유재석, 강호동 등 쟁쟁한 후배들을 물리치고 얻어낸 결실이었기에 더욱 값져 보였고 그래서 그의 소감도 더 감동적으로 와 닿았다.

사실 숨겨진 양심과 양심냉장고로 대변되었던 MBC-TV의 '이경규가 간다.'코너로 폭발적인 인기를 누리던 그는 언제부터인가 강호동 유재석 등 새카만 후배들에게 밀려 시청자들도 다시는 컴백이 불가능할 것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그는 이런 우려를 일거에 불식시키고 KBS를 통해 마침내 재기하는데 성공했다.

그리고는 무소의 뿔처럼 달려가겠다는 자신감까지 피력한 것이다.

2011년 신묘년 새해는 토끼의 해다.

독자들도 새해에는 꾀 많은 토끼를 본받아 각자의 분야에서 최고봉에 올라서길 바란다.

그리고 새해 이맘때쯤이 되면 각자가 남긴 발자국을 자랑스럽게 되돌아보는 시간을 맞을 수 있기를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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