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동우 YTN 청주지국장

"술을 좋아하고 여자도 밝히는데 패자(覇者)가 될 수 있겠소". "전혀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어떻게 하면 가능하겠소". "먼저 사람을 알고(知人), 알면 쓰고(用人), 소중하게 쓰고(重用), 그리고 맡기십시오(委任)". "난 별로 할 일 없겠군".

중국 춘추시대 제나라 환공(桓公)이 관중(管仲)과 나눈 대화다. 관중은 환공의 원수였다. 강소백(姜小白:환공의 이름)은 큰 형 양공이 반란군에 의해 주살되자 둘째 형 강규(姜糾)와 군주쟁탈전을 벌인다. 이 때 관중이 규의 편에 서 소백을 암살하려했기 때문이다.

군주가 된 소백은 위의 대화를 통해 관중의 탁월한 능력과 식견을 확인할 수 있었고 자신을 도왔던 포숙아의 추천으로 관중을 재상에 등용했다.

환공은 관중을 참모로 쓰면서 능력 있는 자의 일을 대신하려하지 않았으며 아랫사람의 구체적인 일에 간섭하지도 않았다.

결국 환공은 관중의 도움으로 춘추시대의 제1패자가 됐고 42년 동안 통치차가 될 수 있었다. 환공의 용인술은 천자문에도 전해진다.

환공은 많은 제후들을 바르게 하고 화합시켜 초나라를 물리치고 난을 바로 잡았으며(환공광합:桓公匡合), 약한 나라를 구제하고 기울어지는 나라를 도와서 붙들어 주었다.

그러나 환공은 관중이 죽은 뒤 권력을 빼앗겼고 내란이 일어났다. 관중의 유언을 무시한 채 간신을 등용했기 때문이다.

중국을 두 번째 통일한 사람 한 고조 유방(劉邦). 통일 한나라를 세울 수 있었던 것 역시 뛰어난 용인술때문이었다.

이른바 漢楚三傑(한초삼걸) 장량, 소하, 한신. 친구이자 스승이었던 장량은 유방을 위해 신출귀몰한 계책을 내어 유방의 천하통일에 지대한 공헌을 한 모략가다. 통일 후 논공행상을 마다해 공명과 이익을 쫓던 사람들이 맞았던 비극을 면한 지혜로운 정치가였다.

명예를 훼손시켜 안전을 꾀하고 자손들을 전장으로 내몰아 유방의 의심에서 벗어난 소하. 유방이 전쟁을 승리로 이끌기 위해 양식과 군사를 시의적절 보급하는 등 전쟁의 뒤치다꺼리 명수였다.

전장에서 활약한 전략가이자 군사가로 유방의 천하통일에 큰 공을 세운 한신. 싸우면 승리하고 공격하면 빼앗는 일에서는 유방도 따를 수 없었다. 유방은 "이 삼걸을 얻지 못했다면 천하를 얻을 수 없었다"고 말했다.

반면 훌륭한 인걸 범증을 옆에 두고도 제대로 쓰지 못한 항우(項羽)는 파부침주(破釜沈舟)의 각오로 싸웠지만 30살에 자살했다. 환공과 유방이 길이 남을 정치가였지만 덕망(德望)까지 갖추진 못한 듯 싶다.

환공은 지나치게 사치스럽고 교만하고 감정에 치우쳐 변덕이 죽 끓 듯했고 미색도 탐했다.

군주쟁탈전에서 둘째 형을 죽였다. 유방도 마찬가지. 송나라 시인 장방평(張方平)은 유방의 일생을 "술 마시고 방탕해 생업은 꾸리지 않았고 땅이 있건만 농사는 생각도 않네. 뜻하지 않게 난세를 만나 공업을 이루더니 아버지 앞에서 형님과 다투네" 라고 평가할 정도였다. 소하와 한신에 대한 유방의 의심은 극치에 달했다.

특히 황제즉위 후 한신을 토사구팽(兎死拘烹)의 주인공으로 만들었다. 결국 환공과 유방이 천하를 쥘 수 있었던 것은 덕망이 아닌 덕망(德網)이었다.

어질고 너그러운 베품(德)이 커 인걸들이 그리워하며(望) 따랐던 것보다 촘촘히 처 놓은 베품의 그물(網)에 인걸들이 걸려들었던 것이다.

우리 정치는 어떤가. 德望도 없고 德網도 없다. 그저 변덕(變德)만 있을 뿐이다. 사람을 알지 못해(不知人) 제대로 쓰지 못하며(不重用人), 맡기지도 못한다(不委任). 모든 정사를 손수 챙겨야 직성이 풀렸던 진시황제는 불사의 꿈을 50세에 접어야했다.

반면 참모들에게 정사를 위임한 당 태종은 '정관지치(貞觀之治:태평성대를 일컫는 말)'라 칭송받을 정도로 후세 제왕의 모범이 됐다. 우리 정치가들이 명심해야할 역사적 교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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