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독자위원 칼럼] 박미영 서부종합사회복지관장

5년 전 쯤 복지관으로 다급히 한 분의 남자 어르신이 의뢰되었다. 누워 계신 분인데 와서 좀 돌봐 달라는 요청이었다. 담당 복지사가 방문해 보니 와상 상태의 노인으로 제대로 식사도 하지 못하고 있었다. 급한 대로 미음을 쑤어 하루에 4번씩 방문하여 드시게 하고 며칠이 지난 후 죽으로, 그리고 다시 며칠이 지난 후 밥으로 바꿔가며 어르신의 식사를 해결하는 한편 지역 봉사대와 연계하여 시간을 정해 기저귀를 갈아 드리고 방 안 공기를 환기시키는 등 어르신을 돌봐 드리자 다행히 어르신은 나날이 기운을 차리고 회복이 되었다.

그런데 놀라웠던 것은 와상 상태 인줄 알았던 어르신이 사실은 아사 직전으로 너무 오래도록 먹지를 못해 기운이 없어 미동도 못하고 겨우 떠주는 미음을 삼킬 힘 밖에 남아 있지 않았던 것일 뿐, 회복이 되자 일어나 걸을 수 있는 만큼 거동이 가능하다는 것을 아는 순간이었다. 하루 이틀만 늦게 만났더라도 정말 굶어 죽을 뻔한 위급한 상황이었던 것이다.

이보다 더욱 차가운 세상을 만나게 한 것은 집 주인 아주머니였다. 집 주인 아주머니에게 "아주머니 식사 하실 때 국 한 그릇만 어르신께 나눠 드리시면 좋겠어요"라고 부탁드리자 아주 냉담한 얼굴로 "나 먹을 것도 없어"라며 돌아서 버리더라는 말을 전해 들었을 때 '세상이 참 강퍅하고 무섭구나'하고 냉담한 현실을 새삼 발견했던 기억이 떠오른다.

얼마 전 한 가난한 예술인의 죽음을 계기로 국회에서는 예술인 사회안전망 확충을 위한 이른바 '최고은 법(예술인 복지 지원법)'이 여야 합의하에 통과할 전망이라고 한다. 시나리오 작가 최고은 씨의 죽음을 계기로 세상은 이 죽음을 사회적 타살로 명명하고 그 죽음의 원인이 단지 개인적 이유만이 아닌 사회 양극화와 빈곤 문제, 공평하지 못한 사회 등 사회적 책임에 더 무게를 두며 이러한 사회적 문제에 방관적 태도를 보이는 사람들에게 사회적 타살의 공범으로서의 책임을 함께 물었다.

이 사건을 접하며 5년 전 아사 직전의 어르신의 모습이 다시 떠올랐고 이러한 죽음 앞에 그 누구도 자유로울 수는 없으리란 생각이 들었던 것은 세상의 물음 앞에 사회적 안전망과 사회적 정의에 대한 고민을 하지 않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사회적 타살... 그리고 사회적 정의.

마이클 샐던의 '정의란 무엇인가'에서는 정의를 판단하는 세 가지 기준으로 '행복'과 '자유' 그리고 '미덕'을 제시하고 있다.

즉 사회구성원의 행복에 도움을 줄 수 있는지 혹은 사회 구성원 각각의 자유로움을 보장할 수 있는지, 사회에 좋은 영향을 미치는지로 정의로움을 결정할 수 있다는 것이다. 정의란 결국 우리 스스로가 누군가의 행복에 도움을 주고, 누군가의 자유를 보장해 줄 수 있도록 도우며 사회에 좋은 영향을 끼치는 미덕을 행할 때 실현된다고 하는 사실을 이야기 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우리는 정의로운 사회를 원한다. 우리가 원하는 정의로운 세상은 우리 스스로가 그 정의를 실천할 때에만 가까이 올 수 있다. 굶고 있는 노인을 두고 돌아서는 것은 결코 정의가 아니다. 생활 속에서 누군가의 작은 행복과 자유를 위해 거창하지 않아도 될 '정의'를 얼마든지 행할 수 있다. 모두가 실천하는 작은 정의로움들이 사회적 폭력과 범죄로부터 우리의 아이, 여성, 노인 등 사회적 약자들과 사회적 소수자들을 보호하고 그들의 행복과 정치적?경제적?사회적 자유를 보장할 수 있으며 사회를 이롭게 하는 미덕을 이루어 사회적 정의를 실현해 갈 수 있다.

정의로운 세상!

그것은 사회구성원인 우리 모두가 함께 이루는 세상이다.
저작권자 © 중부매일 - 충청권 대표 뉴스 플랫폼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