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칼럼]박상언 한국지역문화지원협 사무국장·문화평론가

해방 이후 정부가 수립되기까지의 3년 동안은 좌·우익 대립과 혼란 속에 미군정이 펼쳐진 시기로서 출판등록제, 영화 검열 등이 문화 관련 방침의 거의 전부였다. 이어진 제 1공화국의 문화 관련 정책 주요 목표는 유형문화재의 보호와 보존, 민족문화의 중흥 등이었다. 적어도 80년대 전반기까지 우리 문화정책의 첫 번째 자리는 늘 이들 전통문화 관련 정책이 차지하였다.

직전 글에서 필자는 근대적 의미의 문화정책이 시월유신이 선포된 1972년 10월을 전후하여 출발함으로써 독특한 뿌리와 배경을 가지게 되었음을 지적하였다. 정당하지 못한 정치적 야욕은 70년대 문화정책에 그대로 투영되어 정부와 사회를 비판하는 예술가들에는 지원 대신 재갈을 물렸다. 시인 양성우의 말대로 '겨울 공화국'이었다.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생각과 표현을 꿈꾸는 예술가들은 태생적으로 혁명가이며, 정치적 정당성이 없는 정부로서는 그러한 예술가들이 고울 리 없었다. 따라서 당대 예술과 달리 말이 없는 전통문화는 정부 문화정책의 중심이었다.

80년대로 접어들면서 사회는 더욱 꽁꽁 얼어붙는다. 대학생들의 경우 탈춤, 가면극 등 전통연희와 그 연구가 한 탈출구였다. 전통문화 활동에 대하여는 크게 간섭하지 않는 정부 방침 속에서 우리 전통문화가 간직한 풍자와 해학으로 우회적인 사회 비판이 가능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80년대 중반부터는 대형 문화시설 건립을 통한 문화권 확대가 시도되고, 이어 1990년 문화부가 신설된다. 1994년에는 문화부 안에 문화산업국이 설치되면서 산업으로서의 문화 개념이 강조된다. 문화의 산업적 가치는 현 문화정책의 고갱이이기도 하며, 앞으로도 한동안 지속될 것이다. 간단하게 정리하면 우리 문화정책은 70년대까지 전통문화 전승, 80년대부터 문화권 확대, 90년대부터 문화의 산업화라는 가치를 앞에 두어 왔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2000년대 우리 문화정책이 내걸고 있는, 아니면 내걸어야 할 가치는 무엇일까. 생활로서의 문화이다. 자연이 인간에게 주는 것은 편함 또는 불편함 가운데 하나다. 편한 자연은 그대로 곁에 두지만 불편한 자연은 뜻대로 바꾸어 내는 족속이 인간이다. 이렇게 바꾸어낸 것이 바로 문화 또는 문명이 아닌가. 인간에게 주어진 숙명적인 환경이 자연이라면 인간 스스로가 만들어낸 창조적인 환경은 문화다. 문화는 삶의 궁극이므로 문화정책의 최고의 가치는 생활로서의 문화다.

이제 문화재단의 역할은 분명해졌다. 시·도가 하던 축제의 대행은 문화재단의 목표가 아니다. 공연장 운영도, 예술가와 예술단체 지원도 목표일 수 없다. 이들은 모두 최종 목표 달성을 위한 과정이자 수단일 뿐이다. 문화정책, 그리고 문화재단의 최종 목표는 국민들에게 문화를 가장 편한 환경, 즉 생활이 되게 함으로써 행복을 주는 데 있다. 이것이 지난 어느 글에서 필자가 문화재단은 단순한 사업 중심이나 새로운 기구의 출범 차원을 넘어 분명한 문화사적 비전을 설정해야 한다고 주장한 까닭이다. 최근 기초·광역 단위를 불문하고 공공문화재단들이 연이어 세워지는 배경이 무엇인지 우리 스스로도 모르는 것 같다.

지난 달 한국지역문화지원협의회는 16개 시·도의 2010년 문예진흥기금 지역협력형사업 운영 평가 결과를 발표했다. 이는 곧 각 시·도의 문화행정 역량이며, 2012년 중앙문예진흥기금의 지역별 차등 배분에 반영될 것이다. 총 5개 등급 중 최하위 '매우 미흡'에 속한 3개 지역은 경북, 충남, 충북이다. 이들의 공통점은 광역 단위 문화재단이 없다는 것이다.

그런데 다음 달 1일로 예정됐던 충북문화재단 창립이 인사 문제로 몸살을 앓더니 끝내 늦춰진다고 한다. 안타까운 일이지만, 이 또한 더 큰 성장을 위한 아픔으로 믿고 싶다. 하루빨리 정상화되어 도민들에게 '행복'을 주는 문화정책이 펼쳐질 수 있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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