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세기를 정리하던 1990년대의 마지막 10년간, 세계영화계가 주목한 것은 아시아영화였다. 그리고 그 주목은 21세기 들어서도 계속되고 있다.
 지난해 새 천년의 영화를 가늠한다는 의미를 가졌었던 칸 영화제는 「귀신이 온다」「하나 그리고 둘」 등 8편의 영화에 이런저런 상을 안겨주었었다. 그리고 다시 54회를 맞으며 칸이 인정하는 아시아 영화의 위상은 여전해보인다. 아니 더욱 공고해졌다고 해야할 것 같다.

 지난 19일 발표된 23편의 칸 영화제 공식부문 경쟁작 중 아시아영화는 4분의 1에 달하는 6편. 일본이 3편, 대만 2편, 이란 1편 등이다. 일본영화로는「나라야마 부시코」「우나기」로 황금종려상을 수상했던 이마무라 쇼헤이가 「붉은 다리 밑의 미지근한 물」로 세번째 영예를 노리고 있고, 지난해 「유레카」로 국제비평가협회상을 수상했던 아오야마 신지와 로레에다 히로카즈가 본선에 진출했다.

 전세계에 대만영화의 힘을 보여줬던 신굛구 거장, 후 샤오시엔과 차이 밍량은 「밀레니엄 맘보」「거기는 지금 몇시니」로 다시 칸의 팔레계단을 밟는다. 둘은 「희몽인생」으로 심사위원특별상, 「구멍」으로 국제비평가협회상을 수상한바 있다. 또한 「달에 가린 해」의 모흐센 마흐말바프는 지난해 「칠판」으로 심사위원대상을 수상했던 「칠판」의 사미라 마흐말바프의 아버지로 칸과 인연을 맺었었다.

 특히 올해 일본영화에 대한 칸의 애정은 유별나서 비경쟁 부문을 포함 모두 7편의 영화가 진출하게 됐다. 『일본영화가 칸을 공습했다』는 로이터통신의 표현이 결코 과장이 아닌 것이다.
 하지만 지난해 「춘향뎐」의 경쟁부문 진출로 80년 한을 푼것처럼 기뻐했던 한국영화는 단편경쟁부문에 「신성가족」이 올랐을 뿐이어서 아쉬움을 준다. 특정 영화제 본선진출로 어떤 특정 국가/민족영화의 무게를 일률적으로 잴수는 없는 일이라고 해도 이같은 결과는 전세계영화계가-어떤 이유로든-특별히 주목하고 관심을 기울이는 「아시아영화」에는 한국영화를 위한 「자리」가 없다는 사실을 다시금 확인시켜준다.

 물론 「아시아영화」의 정체성에 대한 논란도 있을 수 있겠고, 서구 영화제의 아시아영화 주목에 깔린 저변의 정치적 동기와 경제적 전략 또한 간과할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그 어떤 논란에서도 한국영화는 전제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만일 20세기 말엽과 21세기초 아시아영화에 대한 주목이 서구 영화계가 아시아영화를 대상화시키고 있으며 이에 따른 이슈화 전략 및 아시아시장과의 연관성을 봐야한다는 주장에 따른다면, 이는 역으로 한국영화가 그들의 구미를 끌어당기고 경제적 이윤창출의 동기를 제공하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을 환기시킨다.

 혹은 아시아영화들의 부상을 「각국의 역사적 특수성에 아시아의 공통된 경험이 겹쳐지고 이제 세계화의 과정속에서 전지구적인 관심사가 다시 겹쳐지는 것」으로 보는 시각에 선다면, 이는 더욱 쓰라린 자각을 안겨주게 된다. 「역사적 특수성」에 대한 천착을 통해 「동시대적」이며 「전지구적」인 발언을 하지 못한다는 평가로 받아들여야 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한국영화의 과제는 어떻게 「아시아영화」라는 범주내에서-혹은 연관성 속에서-자신만의 영역,「자리」을 만들어갈 수 있을 것인가가 돼야한다. 영화제 진출을 학수고대하다가도 불발되면 「영화제가 별거냐」 딴청 부리고, 본선진출에 환호하다가도 별무소득이면 「꼭 상을 받아야 맛이냐」 퉁명스레 내뱉는 대신 필요한 것은 바로 그같은 성숙한 의지일 것이다.

 하지만 지난 25일 열렸던 제38회 대종상영화제 시상식은 이같은 「자리」 탐색에의 의지를 바람결에 날려보낼수 있을만큼 어이없고도 비극적인 사건이었다. 그날의 「총체적 난국-지리멸렬」상은 「아시아영화」범주에서 한국영화 열외의 이유를 알려주고, 세계영화계 지평내 한국영화의 제자리 찾기가 요원하다는 불길한 예언으로 까지 비약되기 때문이다. 하필 칸 경쟁부문 진출 불발소식에 이어 펼쳐진 그 한판 코미디쇼로 인해 한국영화를 사랑하는 팬들은 무거운 마음과 배신감, 분노로 편치않은 시간을 보내고 있다.
저작권자 © 중부매일 - 충청권 대표 뉴스 플랫폼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