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란스런 정치 불구 삶의 향기 '가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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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중부매일
  • 승인 2011.12.01 21: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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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20세기를 말하다<27>1950년대 : 유고슬라비아 '아빠는 출장중' (에밀 쿠스트리차, 1985)
발칸 반도의 세르비아, 크로아티아, 슬로베니아 왕국이 1928년 개명한 유고슬라비아 왕국은 1941년 멸망한다. 종전 후인 1945년 군주제가 폐지되고 유고슬라비아 민주연방의 공산국가가 수립됐으며, 빨치산의 대독항전을 이끌었던 요시프 브로즈 티토는 1946년 유고슬라비아 인민공화국의 수상과 국방상을 겸임한다. 스탈린은 정치적 독자 노선을 모색하는 유고슬라비아를 1948년 코민포름에서 제명시킨다. 에밀 쿠스트리차 감독의 1985년작 '아빠는 출장중'은 스탈린 추종파 대 티토의 반스탈린 노선의 대립으로 혼란스러웠던 1950년 6월로부터 시작된다. 1988년 한국에서 개봉됐던 이 '최초의 유고 영화'는 6살 소년의 눈에 도무지 요령부득이기만 한 어른들의 부조리와, 그럼에도 떠들썩하던 세상의 활기를 담아낸다.

영화를 여는 건 6살짜리 마리크(모레노 데 바르톨리)의 내레이션이다. 전쟁 중이던 1944년 11월 2일 태어났지만, 태어나지 않은 달의 분만큼 수당을 받기 위해 나흘 앞선 10월 29일로 출생신고가 된 이 꼬마는 영화에 푹 빠졌고 아코디언 연주를 썩 잘하는 형 미르쟈(프레드랙 라코비치), 부지런히 재봉틀을 돌리는 엄마 세나(미르자나 카라노비치), 할아버지와 함께 산다. 똥돼지 비치라고 부르면 화를 내는 친구 요자, 늘 멕시코 노래를 부르는 후라뇨 아저씨 등이 이웃이고, 축구공을 사고 싶어 열심히 저금하고 있다.

언젠가 마리크는 후라뇨 아저씨한테 물었었다. 왜 멕시코 노래를 부르는지. "지금 같은 때는 그런 노래가 무난하니까 불러." 건강을 위해 술을 좀 끊으라는 엄마의 말에도 아저씨는 이렇게 대답했다고 한다. "취해 있으면 반사 신경이 둔해져서…맨 정신이면 더 위험해요." '미국의 개'라는 말과 함께 요자의 아빠가 혁명군에게 끌려간 뒤 요자네 집에서는 라디오와 전화가 사라졌다. 스탈린의 메시지가 들어오기 때문이라나. 스탈린의 사진도 떼어냈다는데 그 모든 일들이 어떻게 돌아가는 건지 마리크는 알 도리가 없다. 그는 겨우 6살이니까.

하지만 마리크보다 몇 배나 나이 많은 어른들에게도 이 세상이 아리송하긴 마찬가지인 것 같다. "누구도 믿지 못하는 세상이야. 형편없는 놈들이라고." 할아버지 푸념처럼 마리크의 아빠 메샤(미키 마뇰로비치)도 '형편없'었다. 체육교사 안키차(미라 풀란)와 떠나는 비밀여행이 한 달에 두 번 꼴로 가는 '출장'이었던 걸 누구도 알지 못했다. 그리고 그 비밀스런 '출장' 때문에 메샤는 자신도 이유를 알 수 없는 장기 '출장'을 떠난다.

느닷없이 가족들과 떨어져 강제노동을 해야 하는 잘못이 무엇이었는지 도저히 생각해낼 수 없을 만큼 그건 사소한 것이었다. 안키차와의 기차여행에서 신문을 보고 가볍게 실소하며 "이건, 너무 심한데", 중얼거렸을 뿐이다. 마르크스의 서재 뒤에 스탈린 초상화가 걸린 풍자만화였다. 그것이 스탈린의 일국 사회주의 노선과 대립하던 티토 정권의 독자 노선에 대한 정치적 코멘트로 확대해석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 못한 게 죄라면 죄였다.



'그런 시대'였다. 같은 풍자만화를 보고 "재밌는 걸" 웃는 경찰에게 "내가 아는 사람은 별로라던 걸요?" 무심코 던진 안키차의 말이 불씨가 돼서 메샤는 소환된다. 불안에 떠는 그에게 "미안하지만 내가 신이라 해도 어쩔 수 없군," 사무적으로 말하며 일처리 하던 남자는 메샤의 처남 지요였다. 그리고 어렵게 오빠를 찾은 여동생 세나에게 "누구에게도, 아무 것도 물어보지 말아," 차갑게 자르던 지요의 옆에서 옷매무새를 고치던 여자는 안키차였다.

그렇게 아빠가 '출장' 가 있는 동안 마리크의 집은 침울하다. 엄마는 늘 재봉틀을 돌렸고, 그렇지 않을 때는 울었다. 집에 찾아오는 사람들은 아무 말도 없이 서로 악수만 했다. 그런데도 축구대표팀 경기에 귀 기울이는 이들로 골목은 가득 차고, 술 취한 남자들로 세상은 떠들썩하기만 하다. 누구나 "쓸데없는 것은 묻지 말라"고만 하고, 모두가 "나도 몰라. 전혀 알 수가 없어" 도리질하는 세상이어서 어른들이 축구에 미치고, 술고래가 되는가보다 짐작하기엔 마리크는 아직 어린 6살이었다.



그리고 그 후로도 많은 일이 일어난다. 1년 만에 편지를 받고 아빠가 일한다는 먼 곳, 즈보르니크에서 살 때 마리크는 첫 사랑 미샤를 만나고 헤어짐의 아픔을 겪는다. 원치 않았던 장기 '출장'에도 불구하고, 아빠의 '형편없음'은 나아지지 않았는지 엄마와의 부부싸움도 끊이지 않는다. 그래서일까, 형과 할례를 받던 날 아버지가 떠난 뒤부터 시작된 마리크의 몽유병 증상도 사라질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1952년 7월. 2년간의 '출장'이 끝나고 다시 사라예보로 돌아온 마리크네 가족이 막내 삼촌의 결혼식을 치르던 날도 많은 일이 벌어진다. 메샤는 오랜만에 재회한 옛 연인이자 처남의 여자 안키차를 통해 자신의 '출장' 사유를 뒤늦게나마 알게 된다. 그리고 이제 여덟 살이 된 마리크는 아빠의 '형편없는' 짓을 두 눈으로 똑똑히 지켜본다. "정치 같은 건 엿이나 먹으라고" 일갈하며 할아버지가 양로원으로 떠난 그 날, 유고슬라비아 대표팀이 러시아에게 3대 1로 완승을 거두었다.

/ 박인영·영화 칼럼니스트

이 기사는 한국언론진흥재단 지원으로 게재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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