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을 열며- 정문섭 논설위원

철(鐵)의 사나이 박태준 회장이 영면했다. 향년 84세.

박 회장이 건강에 비해 다소 일찍 우리 곁을 떠난 것은 그가 철의 사나이였기 때문이라는 진단결과가 이를 뒷받침했다.

수술 과정에서 그의 폐를 압박하던 물혹에서 모래의 주성분인 규사가 나왔고, 역시 지난달 제거한 왼쪽 폐에서도 규사성분이 검출된 것이다.

박태준의 일대기를 썼던 조정래 작가는 "포항제철을 건설할 때 마신 모래먼지 때문이며, 그는 대한민국을 위해 막장의 탄부처럼 살다가셨다."고 안타까움을 토로했다.

민정당 대표보다 국무총리보다 포스코 회장보다도 그에게 더 잘 어울리는 말은 역시 '철의 사나이'라는 표현일 게다.

1927년 경남 동래군의 바닷가 시골마을에서 태어난 그는 여섯 살 때 부모를 따라 일본으로 건너간 이후 와세다대학교에서 기계공학과를 다니다가 해방 후 귀국한다. 그리고 육군사관학교의 전신인 남조선 경비사관학교 6기로 들어갔다가 당시 중대장이던 박정희 대위와 운명적으로 만난다.

5·16 혁명을 일으킨 이후 조국의 근대화를 위해 철강 산업이 필수라는 생각을 가졌던 박정희 대통령은 '종합제철소'라는 국가적 프로젝트를 그에게 맡긴다.

"제철소는 아무나 하는 게 아냐, 그러나 임자는 할 수 있어."

이후 그는 정부가 일본에서 받기로 한 '대일청구권 자금' 1억 달러를 발판으로 영일만 허허벌판에 포항제철을 건립한다.

그는 막대한 자금이 투입된 제철소 건설 계획을 진행하면서 한때는 주위의 비난과 이권을 둘러싼 음모도 숱하게 받았고 심지어는 가택수사를 받은 적도 있다. 이때마다 그는 박정희 대통령이 친필로 써준 '종이마패'를 통해 어려움을 극복할 수 있었다고 한다. 포항제철의 인사 및 경영에 대한 전권을 손에 쥔 박태준은 오직 제철소 건설에만 전념해 마침내 1973년 6월 9일 제 1고로에서 쇳물을 쏟아내는 감격을 맛본다.

제철로써 나라에 보답한다는 '제철보국(製鐵報國)'과 포항제철소를 성공하지 못하면 오른편 영일만에 모두 빠져 죽자는 '우향우 정신'이 빛을 본 결과였다.

이후 92년 10월 광양제철소에서 광양 4기 설비 준공식을 마무리한 박태준 회장은 이튿날 동작동 국립묘지로 찾아가 박정희 대통령에게 임무를 완수했다고 보고한 뒤 모든 자리에서 물러났다. 박 회장은 교육에 끼친 영향도 막대했다. 그는 포항제철 회장 재직 시절 초ㆍ중ㆍ고교 15개를 설립해 직원들의 자제들이 공부할 수 있는 여건을 마련해주었다. 85년에는 포항공대를 설립해 전 학생에게 장학금을 지급하고 최고의 교수를 초빙해 전국 최고의 명문대학으로 육성시켰다.

박태준의 경영인으로서의 진가는 소유와 경영의 분리를 철저히 이행했다는 사실을 빼놓을 수 없다. 88년 포스코 직원들이 발행주식의 10%를 우리사주로 배정받을 때에도 그는 단 한주도 받지 않았다고 한다.

결국 타계한 순간 그에게는 주식도 주택도 아무것도 없었다. 박태준 회장은 그러나 눈을 감는 마지막 순간까지도 포스코가 국가산업의 동력으로 성장한 것에 대해 만족하며 "이제부터는 대한민국을 넘어 세계 최고의 철강 회사가 될 수 있기를 바란다"고 유언했다고 한다. 용광로보다 더 뜨거운 삶을 살았던 박태준 회장, 그가 이제 한 줌의 흙이 되기 위해 우리 곁을 떠나려 하고 있다.

故 박태준 명예회장님! 고국은 당신을 잊지 못할 겁니다. 부디 영면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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