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뜨락> 이방주

"아프니까 청춘이다."라는 책이 서점가에서 베스트셀러 목록에 오른 지도 오래 되었다. 청춘은 아픈 것이다. 아픈 청춘이 미래를 보장한다. 그러므로 청춘은 당연히 아파야 한다. 아픈 청춘을 참고 견디어라. 이것은 사회와 역사가 젊은이들에게 지우는 가혹하고 무거운 짐이다.

초등학교 동기생 송년모임에서 한 친구가 아들 혼사에 대해서 묻는다, 내게는 가혹한 질문이다. 이 친구는 남의 자식의 입학, 취직, 결혼에 대한 물음이 얼마나 큰 실례인지 아직 모르는 모양이다. 술에 많이 취했다. 집에 돌아와 11시가 다 되어 퇴근하는 아들을 맞는다. 취미 생활도 하고 연애도 할 나이라는 것을 생각하면 측은하다. 재계가 젊은이들에게 짊어지우는 혹사는 이미 도를 넘어섰다. 우리 젊은이들만큼 청춘을 아프게 보내는 나라가 지구상에 또 있을까? \



요즘 학생들도 그렇듯이 고등학교 내내 밤에도 10시, 11시까지 이른바 야간 자습을 했다. 하고 싶지 않지만, 하지 않으면 안 되는, 할 수밖에 없는 야간 자습이었다. 그리고는 마치 그들의 미래처럼 어두운 밤길을 차가운 바람을 맞으며 집에 돌아오면 파김치처럼 쓰러졌다. 머리 위에 떠 있는 별을 바라볼 사이도 없었을 것이다.

대학에 입학해서도 벗을 수 없었던 것은 영원한 청춘의 짐이었다. 꿈꾸던 낭만은 아픈 현실로 바뀌어 왔다. 비싼 등록금, 닭장 같은 고시원, 힘겨운 아르바이트, 취업에 대한 부담감은 대학의 꽃이라는 동아리활동조차 가로막았다. 그래도 학과 사무실 같은 데서 자면서 컵라면으로 끼니를 때우는 친구들보다 낫다고 부모를 안심시켰다. 이렇게 걸어온 아픈 청춘의 눈길에 국가는 입대라는 서리를 내려 준다. 졸업도 하기 전에 학문을 머나먼 전설로 만들어 버리는 것이다. 세계 10위권의 경제 대국의 기성세대들은 이들의 아픔을 일종의 통과의례처럼 당연시한다.

어렵게 들어간 대학을 육칠년 걸려 더 어렵게 졸업하고 취업의 장벽에 부딪쳤다. 남자들은 서른 고개를 넘기지 않고 취업을 한 것만도 신의 은총이라고 생각해야 한다. 사회에 내딛는 대망의 첫발이 때로는 헛디딤이 된다. 뻔히 다 알면서도 어디 취업은 했느냐는 사람들의 걱정인 듯 비아냥거림인 듯 눈총을 받으며 대학입시 실패보다도 더 쓰라린 아픔을 겪었다.

우리 사회는 대학에서 닦은 학문을 실재에 적용하려는 젊은이들의 패기에 코웃음을 보낸다. 오늘날 직장은 학문을 현실화하기에는 너무나 미래를 무시하고, 삶의 터전으로 삼기에는 너무나 빈약하고 가혹한 곳이다. 가진자들은 고등학교 시절보다 더 늦은 밤까지 노동을 요구한다. 싹쓸이를 노리는 승리자의 탐욕은 노동 다음에 누리고 싶은 행복한 여가까지 앗아간다. 거기는 평화가 있는 곳이 아니다. 다만 좌절과 굴욕만 있을 뿐이다. 그래도 서른 너머까지 백수인 친구에게 소주를 살 수 있으니 얼마나 행복한 일이냐.

아픔을 겪을 만큼 겪은 오늘날 젊은이들에게 결혼이라는 과제가 눈앞에 다가온다.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는 것은 행복이 아니라 아픔이다. 三十而立이란 말은 퇴색된 지 오래다. 스스로 설 수 있는 준비가 미흡하기 때문이다. 찌들고 지친 한국의 청년들은 대충 그냥 살고 싶을 지도 모른다. 그러나 언제까지 부모에게 의지해서 살 수 있을 것인가. 언제까지 사랑하는 여인을 바라만 보고 있을 것인가. 이것은 또 그들에게 주는 참을 수 없는 아픔이다.

일요일 아침 늦잠에 빠진 아들을 바라보며, 또 서울 외로운 자취방에서 혼자 쓰러져 자고 있을 가련한 딸아이를 생각하며, 한국의 젊은이들에 대한 역사의 책임을 생각해 본다. 왜 이 아이들에게 '아프니까 청춘'이라는 말밖에 위로할 말이 없는가? 기업은 더 많은 젊은이를 채용하는 후덕함을 보일 줄 모른다. 가진자들은 청춘들에게 여가를 빼앗아 태산을 쌓고 싶은 탐욕을 버릴 줄 모른다. 행복을 누려야 할 시간을 돈으로 계산하는 졸렬한 사고가 원망스럽다.

'아프니까 청춘이다.' 젊은이들에 대한 멘토(mentor)라고 평가 받는 이 책은 아픈 청춘들에게 많은 위안을 주었을 것이다. 나는 내가 가르치는 학생들에게 이 책을 읽고 '자기 사랑'에 대해 깊은 생각을 해보라고 또 다른 아픔을 주었다. '청춘이니까 아파야 한다.' 말은 좋지만 젊은이들의 행복을 위해 마련해 주어야 하는 사회 책임을 회피하는 것 같아 마음 아프다.

임진생인 나는 2012년 새로운 임진년을 맞는다. 20대 초반에 대학은 어렵게 졸업했으나 순탄하게 취업을 해서 거의 40년 가까이 편안하게 지냈다. 그간 젊음의 아픔이 전혀 없었다고 할 수는 없지만, 요즘 아이들에게 기성세대가 짊어지운 아픔에는 미치지 못한다. 그런데 현대 사회는 빈부의 격차, 가혹하게 비싼 학비, 지나친 경쟁 체제로 너무나 큰 아픔을 젊은이들에게 짊어지웠다.

임진년은 흑룡의 해라고 한다. 나는 내가 흑룡이라는 생각은 하지 못하고 살았다. 흑룡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도 생각하고 싶지 않다. 다만 모든 색을 다 포함하고 있는 흑색처럼 내 아이의 아픔을, 우리 젊은이들의 아픔을 다 해결해 주는 한 해가 되었으면 좋겠다. 겨울이 새봄을 간직하고 있듯이 흑룡의 해에는 젊은이들에게 희망을 보장해 주었으면 좋겠다. 내 아이가 자신 있게 결혼하여 사랑하는 사람과 따스한 보금자리를 차리고 모든 아픔을 졸업하는 한 해가 되었으면 좋겠다.

아프니까 청춘이다. 우리 어른들은 아픔은 젊은이의 통과의례라며 당연시하는 것이 사랑이라 생각하지 말자. 정치인도 경제인도 교수도 부모도 우리 젊은이들에게 학업과 취업, 결혼과 삶에 아프지 않은 청춘을 보낼 수 있도록 기틀을 마련해 주는 것이 경제 대국이 하는 진짜 사랑이라고 생각하는 한해가 되었으면 정말 좋겠다.



▶'한국수필' 신인상(1998), 충북수필문학상(2007) 수상
▶한국수필작가회 회원, 내륙문학회원, 충북수필문학 회원
▶충북수필문학회 주간 역임, 내륙문학회장 역임
▶수필집 '축 읽는 아이', '손맛', 칼럼집 '여시들의 반란', 편저 '우리 문학의 숲 윤지경전'
▶충북고등학교 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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