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을 여는 사람들 <2> 청주 육거리시장 야채장수 김을수씨

육거리 새벽시장에서 커피를 파는 김금분(65) 씨의 핸드폰은 먹통이 됐다. 밀린 통화요금 9만500원을 갚지 못했다. 김씨가 파는 커피는 종이컵 한 잔에 500원. 181잔을 팔아야 하는 돈이다.

금분씨는 매일 새벽 2시부터 오전 8시까지 육거리 새벽 야채시장 노점상인들을 대상으로 커피를 판다. 하루도 빠짐없이 같은 자리를 지키고 있지만 요즘은 커피 열 잔을 팔기도 녹록치 않다.

새벽 겨우살이가 을씨년스럽기는 금분씨네 커피로 언 속을 녹이는 야채장수들도 마찬가지다. 15년 전, 야채 노점상으로 시작해 버젓이 가게까지 마련했다는 김을수(59) 씨는 개시(판매)도 못하고 돌아가는 야채장수들이 한 둘이 아니라고 말했다.

"육거리 새벽 도깨비시장 가격 싼 거야 대한민국에서 다 알잖아요. IMF때도 잘 됐던 곳이에요, 여기가. 작년 신정때만 해도 말도 못하게 잘 됐는데 올해는 경기가 많이 죽어서 그런지 휑 하네. 시절이 편한 걸 좋아하니까, 젊은 사람들은 대형매장으로 다 빠지고 여기는 연로한 사람들만 와요."

▲ 육거리 새벽 야채시장을 지키는 김을수씨는 힘들지만 오늘도 새 희망으로 하루를 시작한다./신동빈


대형마트와 SSM(Super Supermarket)의 파고는 육거리 새벽시장까지 집어삼킬 태세였다. 중소상인들은 물론, 노점을 펼친 도매상인도, 직거래에 나선 농부들도 대형마트가 흥하면 흥할수록 시장과 함께 시들어 갔다.

6일 새벽 5시30분. 청주 육거리 시장 정문에서 꽃다리 방향으로 펼쳐진 새벽 야채시장 풍경은 한가롭기만 했다. 사람들 발길로 붐비었던, 걸핏하면 단속이 나올 만큼 차량이 많았던 시장풍경은 찾아볼 수 없었다. 오천원 어치도 팔고, 팔천원 어치도 팔고, 누군가는 개시도 못하고 돌아가는 어처구니없는 상황이 반복될 뿐이었다. 을수씨는 "철물점을 하다가 한 번 고꾸라지고, 야채장수를 하다가 서너번도 더 고꾸라져봤지만 요즘같은 상황은 도무지 답이 보이지 않는다"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시장에 업종구분이 사라졌어요. 미장원에서도 채소랑 멸치를 팔고, 벽지가게에서도 야채를 팔아요. 생선을 파는 가게도 있는 걸. 갈라먹기가 만연해 있다보니까 먹고 사는 환경은 점점 더 복합적으로 힘들어요. 새벽에 자리만 차지하면 뭘 해. 수입이 없는 걸."

환경관리원들이 탄 청소차가 가던 길을 멈추고 상인들 틈에서 장작불을 쬔다. 서로 서로 잘 아는 얼굴인 듯, 누구는 주머니 쌈짓돈을 꺼내 커피를 사고, 누구는 난로가로 소매를 잡아끌며 언 몸을 녹여준다.

을수씨는 "십수년을 함께 한 상인들이 형제와 같다"고 말했다. 철물점을 하다가 주저앉았을 때도 오뚝이처럼 다시 일어난 곳이 새벽 야채시장이었다. '죽지 못해 나온 노점'에서 이웃들은 외상도 주고 일감도 주며 좌절했던 그를 일으켜세웠다. 형이 되었다가 동생도 되었다. 그의 야채가게 이름이 '형제농산물'인 이유는 굳이 물어보지 않았다.

"차라리 단속을 나올 때가 좋았어요. 사람도 차도 지나다니기 어려울 만큼 붐비던 때가 있었지. 대구며 해남까지 산지를 찾아다니기도 했어요. 그런데 이젠 그렇게 못해. 야채값이 헐값이라 마진도 형편없고. 옛날에는 그렇게 단속했어도 서로 서로 봐주면서 정을 쌓았는데 요즘은 시장에 정이 없어요. 청주시가 새벽시장에도 신경을 써줬으면 좋겠어. 뭐가 어려운 지도 좀 듣고, 주차공간도 마련해주고, 그렇게 하면 사람들이 많이 오지 않을까?"

얼어붙은 육거리 새벽시장, 난로 속 마른 장작만 탁 탁 소리를 내며 시뻘겋게 타들어가고 있었다.

/ 글 김정미·사진 신동빈

저작권자 © 중부매일 - 충청권 대표 뉴스 플랫폼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