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부터 10년전인 1991년 5월 소위 「분신정국」을 뜨겁게 달궜던 글이 하나 있었다. 「죽음의 굿판을 걷어치워라」라는, 자극적이고 선동적인 제목을 단 김지하시인의 칼럼이 일간지에 실렸던 것.
 당시 많은 민주화운동 관련자들을 분노케하고, 글쓴이 또한 숱한 날을 불면케했다던 그 칼럼에 대해 김시인이 10년만에 유감표시를 했다고 해서 화제다. 이런저런 사정도 있었고, 무엇보다도 「돌아가신 분들과 당시 상처입었던 젊은이들에게 유구무언」이라고 한 문학계간지와의 대담에서 밝혔던 것.
 김씨의 유감표명과, 그에 대한 왈가왈부를 지켜보면서 한가지 안타까운 생각을 하게된다. 당초 「젊은 벗들, 역사에서 무엇을 배우는가」였다가 신문사 편집과정에서 제목이 바뀌었다던 그 글은 불행히도, 최근 한국영화라는 과녁을 향하는 화살로 꽤 쓰임새있겠기 때문이다.
 시인의 유감표명에도 불구, 아직도 용서받지 못하고 있는 그 문제의 글은 다음과 같이 시작한다. 「젊은 벗들! 나는 너스레를 좋아하지 않는다. 잘라 말하겠다. 지금 곧 죽음의 찬미를 중지하라. 그리고 그 굿판을 당장 걷어치워라. 당신들은 잘못 들어서고 있다. 그것도 크게!」
 21세기 벽두, 가공할 흥행신기록을 해마다 갈아치우는 한국영화판에서는 지금 「죽음의 찬미」라 이름붙일 어떤 경향을 발견하게 된다. 총싸움이 난무하는 서부극도 갱스터도 아닌데 장르를 불문하고 꼭 죽음이란 사건이 끼어든다. 그 죽음은 내러티브가 힘든 대장정을 마치고 파국으로 접어드는 길목이면 어김없이 나타나 모든 상황을 평정하는 위력을 발휘하곤 한다.
 물론 「8월의 크리스마스」가 효과적으로 말하듯, 죽음은 삶과 등을 맞대고 있는 동전의 양면이다. 하지만 갈등이 꼬일대로 꼬여 마땅한 해법을 찾지 못할 때마다 죽음으로 풀어내는 텔리비전 드라마의 상투적 수법을 굳이 혈기방장한 한국영화계가 답습하는 까닭을 정말 알도리가 없다.
 더욱이 괴이쩍은건 죽음을 다루고 활용하는 그 태도이다. 텔리비전 드라마는 그나마 의외이거나 불가항력의 상황임을 내세우거나, 그같은 상황에 치열하게 반발하고 좌절하는 모습을 그려냄으로써 상투적 우연성에 대한 비난을 입막음하려고 노력한다. 그런데 일련의 한국영화들에서는 「죽음에 대한 순응」이라고 이름붙여진 태도가 확연하게 드러난다.
 「선물」에서 차분하게 죽음을 수긍하는 이영애는 그저 사랑하는 남편 곁을 깔끔하게 떠나는 것 외에 다른 선택은 생각도 안한다. 「친구」의 전체 이야기는 동수의 「폼나는」 마지막을 정점으로 충실히 복무하고 있으며 「번지점프를 하다」의 두 남자는 가뿐한 걸음으로 번지점프대에 올라선다. 한가로이 소풍이라도 가는 것처럼.
 마치 득도한 고승처럼 죽음을 삶의 또다른 반영으로 받아들이는 듯한 이런 인물들의 태도는 비장미 확보와 정서적 고양을 위한 전략적 측면으로 인해 진정성에 훼손을 자처한다. 죽기 싫다고, 살고 싶다고 마구 악쓰는 것보다는 그저 품위있게 눈물 한방울 떨구고 표연히 사라지는 것이 더 진한 감동을 우려낸다는건 대체 어디서 비롯된 판단일까.
 살면서 「버텨내는 것만도 장한 일」이라는 누군가의 말을 새록새록 되새길 때가 있다. 잘못된 선택을 하거나 비참한 후회를 곱씹을지라도 중요한 건 살아남는 일인 것이다. 살아남아서 싸우기도 하고 또 깨지기도 하고, 혹은 피를 토하는 모습을 우리 영화들 속에서 보고싶다. 폼나게 죽어 사라진 인물에 대한 헛헛한 그리움은 이제-동수의 말대로-「고마해라」인 것이다.
 그래도, 그나마 「파이란」은 죽음을 경유해 삶을 이야기하는 작품의 진정성이 와닿는 드문 경우였다. 하지만 「인디언 썸머」를 보면서는, 화장않고도 더이상 예쁠수 없는 사형수 신영이 눈을 고즈넉히 내려감고 스스로 죽음을 선택할 때, 또 닫히는 법정 문사이로 애절한 눈빛을 준하와 나눌 때 그만 빽 소리를 지르고 싶어졌다. 「죽음의 굿판을 걷어치워라…이젠 제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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