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을 여는 사람들 <3> 진우범씨

또 한사람을 보냈다.

인생은 예측 불허의 날씨와 같아서 때로는 불행을 매복한 채 숱한 운명을 가로질렀다. 참으로 변덕스러웠다. 한 달에도 여러 명, 고인(故人)을 만났다.

1957년생 진우범 씨의 직업은 상례사. 죽은 사람의 몸을 씻긴 뒤 수의를 입히고 염포로 묶는 염(殮)을 하고 있다. 사람들은 그를 염사라고 했고, '염쟁이'라고 낮춰 부르기도 했다.

25일 저녁, 청주의료원 장례식장 로비는 어느 때보다 많은 문상객들로 북적였다. 교대 근무(오후 6시부터 아침 9시까지)를 나온 진우범 씨와 사무실에서 만난 시간도 그 무렵. 26일 새벽에도 그는 누군가의 마지막을 지극한 정성으로 지켜줬을 것이다.



생의 갈피에 숨어 있는 예기치 못한 운명들을 그는 지난 15년 동안 담담하게 수습해 왔다. 교통사고로 목숨을 잃은 다섯 살 짜리를 보내면서는 차갑게 식은 아이를 부둥켜안고 울부짖었던 젊은 부모와 함께 울었고, 병석의 노부모를 고약하게 방치해 놓고는 짐짓 슬픈 체 조문객을 맞는 위선적인 자손들을 지켜보면서는 실망스럽다 못해 분노가 치밀기도 했다.

"돌아가신 분들 여기 오실 때 보면 어떤 대접을 받았는지 다 알 수 있어요. 자손들이 깨끗하게 닦아 고운 옷 입혀서 모셔오는 분들도 있지만 저조차 방문 열고 들어가기 싫을 만큼 환자를 내버려 두는 경우도 봤어요. 연세가 많아서 자연스럽게 돌아가신 분들은 살이 말라 깨끗한 모습이지만 오랜 투병으로 몸이 부어 있거나 살집이 있는 분들은 손길이 많이 필요하죠."

홀로 쓸쓸히 숨을 거두고는 며칠이 지나서야 발견된 노인, 사는 게 괴로워 스스로 목숨을 끊어야 했던 청년, 이역만리 한국 땅에서 차가운 시신으로 가족의 품에 안겨야 했던 외국인 노동자까지 그가 만난 고인들 가운데는 복을 누리고 곱게 생을 마감한 호상(好喪)과 길상(吉喪)도 있었지만 차마 안타까워 소홀히 보낼 수 없었던 참상(慘喪)과 흉상(凶喪)도 적지 않았다.

"가장 기가 막힌 것은 외국인들을 보낼 때였어요. 일 년이면 대 여섯 명은 외국인을 만나게 되는데 살자고 온 먼 외국 땅에서 죽음을 맞이했으니 얼마나 딱해요. 빈소도 차리지 못하는 경우가 많고, 화장해서 고국으로 돌아가는 경우도 있고요."

사람들은 말한다. 잘 사는 것만큼 잘 죽어야 한다고. 하지만 태어남도 죽음도 예측불허의 투쟁이고 연속임을 그 역시 알고 있었다. 심지어 스스로 목숨을 끊는 사람들조차 죽음에 이르는 과정은 자신과의 투쟁, 싸움의 연속이었을 것이다.

"자살한 사람들 보면 안타깝죠. 요즘은 정말 자살한 사람들이 많아요. 죽고 싶다는 독한 마음을 먹을 때마다 그 마음으로 세상을 살면 될텐데 하는 생각을 하는데 얼마나 괴로웠으면 그랬을까 싶기도 하고…."

세상과 맞서다 생을 마감한 고인에게 그는 절대 소홀함이 없다고 했다. 남들은 기피하고 천대하는 이 직업을 진우범, 그도 살기 위해 선택했다. 이장(移葬)과 산소 일을 맡아오다 마흔 한 살에 시작한 상례사 일은 청주의료원 장례식장에서 염을 하는 네 사람 가운데, 또 청주시내 장례식장의 상례사들 가운데 가장 오랜 경력으로 이어졌다.

염을 하는 시간은 보통 1시간에서 1시간30분 정도. 화상을 입은 고인을 대할 때면 경직돼 오그라든 핏줄을 조심스럽게 늘려 풀어주며 염에 임했다. 상황에 따라, 상태에 따라 고인을 대하는 방식은 달랐지만 조금이라도 소홀한 날은 속이 좋지 못했다.

장례식장에서 만난 다양한 인간군상을 통해 깨달은 것이 있다면, 산 사람은 거짓말을 해도 죽은 사람은 거짓을 말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들은 하나같이 말이 없었지만 마지막 모습은 살아온 삶을, 최후를 웅변적으로 보여줬다. 그러면서 되새긴다. 잘 죽는 것만큼 잘 사는 것은 또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 김정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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