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20세기를 말하다 <32> 1950년대 미국(1)'하늘이 허락한 모든 것'(더글라스 서크, 1955)

1952~1960년 재임한 아이젠하워의 슬로건처럼 미국의 1950년대는 '평화와 전진과 번영'의 시기였다. 한국전쟁은 2차 대전 이후 불경기 상태로 접어든 미국 경제에 다시 활력을 불어넣었고, 국민총생산은 빠른 속도로 증가했다. 경제학자 겔브레이스가 '풍요의 사회'로 명명한 1950년대 미국을 이끌어간 것은 자본주의와 정치적 다원주의를 바탕으로 작동하는 새로운 아메리칸 드림이었다. 하지만 독일에서 망명한 멜로드라마의 거장 더글라스 서크는 '하늘이 허락한 모든 것'을 통해 팽배한 낙관주의 아래 점증하던 사회적 갈등과 거대한 불안을 예리하게 포착한다.

12시를 알리는 시계탑의 모습으로 영화가 시작되면 타이틀이 나오는 동안 카메라가 천천히 이동하며 지상을 내려다본다. 곱게 물든 가로수와 깨끗한 도로, 깔끔한 외관을 자랑하는 건축물들 사이로 잘 차려입은 남녀들이 여유 있는 걸음을 옮기고 있다. 자전거를 탄 남자, 유모차를 끌고 담소를 나누는 여자들, 중절모 쓰고 서류 가방을 든 남자들, 오가는 차량들 모두 부족할 것 없는 물질적 풍요와 안정의 시간을 증명하기에 부족함이 없다.

최근 남편과 사별한 상류층 여성 캐리(제인 와이먼)의 삶도 수량 풍부하고 맑은 호수 같다. 대도시서 학교 다니는 딸 케이(글로리아 탈봇)와 아들 네드(윌리엄 레이놀즈)가 찾아오면 주말을 함께 보내고, 친구 사라(아그네스 무어헤드)와 파티를 다니면서 '남는 게 시간 뿐'인 중산층 백인 주부들의 일상을 살아간다. 다만 다른 사람들 뒷이야기나 전하는 클럽활동을 마땅찮아 하며 혼자 책 읽고 피아노 치기를 즐기는 차이가 있을 뿐.

그처럼 잔잔한 호수와도 같은 캐리의 일상과, 평화롭고 안정되지만 무료하기 그지없던 한적한 소도시에 평지풍파가 인다. 마을의 누구도 모르는 이 없던 정원사 마틴의 손자 론(록 허드슨)과 캐리의 로맨스는 연상연하 커플인데다, 경제적·사회적 지위의 현격한 차이로 인해 뜨거운 스캔들이 된다. 어깨를 훤히 드러낸 빨간 색 드레스만 입어도 뒷공론이 무성한 폐쇄적인 곳에서 '사랑에 빠진 두 사람이 결혼하는 일'이 '사람들이 인정하는 결혼'과 같지 않을 때 겪는 곤경으로 둘의 사랑은 시험에 빠진다.

캐리에게 가장 결정적인 타격은 차갑고도 경멸에 찬 아이들의 반응이었다. 사회복지를 전공하는 케이는 여성의 재혼에 대한 사회적 편견을 '과부를 생매장하는 이집트 관습'이라며 질타하면서도 엄마의 낯선 사랑은 단호하게 배척한다. "아빠의 아내로 살았던 사람이 어떻게 감히 그런 사람과 결혼할 생각을 할 수 있느냐"며 캐리의 사랑을 론의 건장한 남성성에 대한 육체적 매혹으로 절하하고 매도한 네드는 집을 나가버린다.

통속적 멜로드라마는 남녀 간의 이성애적 결합이 환경의 억압으로 좌절되는 시나리오를 통해 감정적 카타르시스를 선사한다. '하늘이 허락한 모든 것'은 이러한 통속적 플롯에 당대 사회현실을 민감하게 반영함으로써 이를 성찰케 한다. 소도시를 들썩이게 한 론과 캐리의 사랑은 삶의 방식을 둘러싼 두 개의 가치를 선명하게 대비시키는 계기가 된다. 여성의 삶을 '가족'과 '모성'으로 환원시키는 당대의 가치관은 엄마/미망인으로서 캐리의 선택을 강요한다. 또한 웅장한 위용의 흰 색 저택으로 상징되는 '전통'과 같은 맥락에 부르주아적 가치관을 바탕으로 한 중산층적 생활방식이 배치된다.



나무가 주는 행복감에 일생을 헌신하는 자유주의자 론과 그의 생활방식은 그 맞은편에 위치한다. "왜 성공을 위한 필사적인 조급함 속에서 살아야 하는가?" 물으며 생태주의적 삶을 제안한 소로우의 '월든'을 삶의 지침 삼아 론은 '자신에게 진실된 삶'을 살아가고자 애쓴다. 이에 따라 오래된 물레방앗간을 개조한 그의 집은 화려하지만 실속 없는 클럽활동과 각종 파티, 새로운 문물의 전도사처럼 보급되던 텔레비전이 약속하는 삶과는 전혀 다른 삶의 방식을 지향한다.

이처럼 팽팽하게 맞선 두 가치관의 충돌 끝에 내리는 영화의 결론은 보수적인 아이젠하워 시대를 감안하면 충분히 전복적이다. '아이들에 대한 책임'을 이유로 캐리는 '엄마/미망인의 자리'로 돌아가지만, 정작 결혼과 취업을 이유로 케이와 네드가 떠나버린 집에 혼자 남는다. 그리고 비로소 깨닫는다. 자신이 지켜야 한다던 '집안 대대로 내려오던 집'은 결국 아무 것도 아닌 공허뿐이었음을. 또한 론과의 결혼 자체보다는, 더 이상 자신이 자신의 집에서 늘 살아온 방식으로 살지 않을 것이라는 선택이 중요한 것임을 절감한다.

결국 캐리는 남편의 유품과 외로움을 달래주던 피아노, 그리고 '드라마, 코미디, 인생의 광장이 손 끝에 있'는 것처럼 만드는 텔레비전이 있는 집을 떠난다. 그리고 론이 새롭게 고친 호숫가 물레방앗간 집으로 '돌아가' 불의의 사고를 당하고 누워있는 론의 손을 꼭 잡는다. '하늘이 허락한 모든 것'은 두 사람을 유리창 너머로 지켜보는 사슴의 모습으로 끝난다. 그 시선에는 물질적 진보가 약속하는 풍요로운 삶에 대한 당대의 낙관에 대한 회의와 우려가 담겨있다.

/ 박인영·영화칼럼니스트

이 기사는 한국언론진흥재단 지원으로 게재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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