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칼럼] 홍양희 충북테크노파크기업지원단장

소셜네트워크, 트위터, 페이스북, 디지털 미디어 등 의사소통을 위한 수단은 인간의 진보와 함께 다양화되고 비약적으로 발전해 왔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소통의 진정성은 점차 사라져 서로의 공감대를 형성하는 것은 어려운 현실이 됐다.

이 때문에 우리는 소통에 대해서 민감하게 반응하고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제대로 된 소통을 위해서는 어떤 방법이 적합할까? 소통의 가장 궁극적인 목적이 당사자 간의 교감에 의한 공감형성 즉 소통의 완결편이 곧 공감이라 할 수 있기에 공감을 위한 바람직한 소통의 방법들을 다시 찾아야 할 때이다.

원시시대부터 시작되어온 의사소통의 가장 기본에 자리잡고 있는 것이 바로 바로 몸짓, 손짓 등의 제스처(Gesture)라 할 수 있는 바, 제스처는 유기생물이라면 어떤 개체이건 의사소통의 유틸리티로 작용하고 있다.

그러나 인류학의 역사적 관점에서 보면 언어와 문자가 개발돼 활용된 이후부터는 제스처에 대한 중요성이 간과되었기에 표현, 인지의 범위가 축소 내지는 잊혀졌고 그 결과 의사전달 외에 그 기저에 있는 감정의 전달은 잘 되지 않는 것이 현실이다.

국가와 국가간의 경쟁시대로 접어든지 50여년, 반세기의 국제경쟁사회에서 우리는 의사를 소통하는 방법으로 언어나 글자(문자)를 활용하여 잘 살아왔는지는 몰라도 감정의 전달과 교감을 이루어내기는 그리 수월하지 않았다고 볼 수 있다.

실제 연구에 의하면 사람은 대화를 하는 그 순간에도 끊임없이 몸짓과 손짓 그리고 표정으로 자신을 표현하고 있으며 그 방식을 취하는 사람과 취하지 않는 사람의 차이는 타인이 자신의 의사에 공감 하는가 공감하지 않는가로 나타난다고 한다. 그것은 그 사람을 지지(支持)하는가 지지 하지 않는가로 표현되기도 한다.

1980년대 미국의 대통령으로 당선된 로널드 레이건은 라디오시대에서 비디오시대로 넘어가는 미디어 파워를 가장 잘 활용한 당사자로 유명하다.

아나운서로서 영화배우로서 미디어에 충분히 적응돼 있던 레이건은 특유의 제스처와 언변술로 청중들의 마음을 사로잡기 충분하였고 그의 표정과 행동은 정책결정마저도 진심성 어린 것으로 전파되어 전폭적 지지를 얻은 대표적 사례다.

소통과 교감을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상대방에 대한 이해가 선행돼야 한다.

다른 사람에게 나의 의사를 전달하기 위해서는 내가 먼저 다른 사람에 대해서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는 세상을 좀더 오래 산 연륜만으로는 부족하다. 특히 정보화, 디지털시대에는 나이의 숫자만큼 아는 사람도 드물다.

어느 모임에선가 나이가 조금 더 든 선배 하나가 잘못된 영어로 표현하고 있는 모습을 본 적이 있다.

다들 배울 만큼 배운 사람들이라고 생각해서인지 인상만을 찡그릴뿐 그 자리에서는 그 어느 누구도 그 선배의 잘못된 표현방식을 바로 잡아준 사람이 없었다.

그 이후 다른 모임에서도 똑같은 표현을 계속 사용하는 모습을 보고 '아 저 선배는 주변에 그를 위해 조언해 주는 사람이 없는가 보다'라고 생각한 적이 있다.

이후 다른 이들과 얘기하는 도중에 공통된 의견이 '그는 배우려고 들지도 않을 테고 주변의 시선이나 표정에 대해 아랑곳 하지 않는 사람이기 때문에 얘기하지 않는 것'이라고들 했다.

아마도 그 선배가 대화를 하면서 청중을 보고 상대방의 '표정'변화를 읽었더라면 최소한 무엇이 잘못됐는지 물어보지 않았을까 라는 생각이 들었다.

소통의 시대를 넘어 교감의 시대로 접어들기 위해서 다시 원시적인 방법으로 돌아가자는 말을 하고자 시작한 것은 아니다. 디지털 시대로 들어오면서 0과 1만으로 표현할 수 없는 아날로그적 사고와 방식을 전달할 수 있는 방법으로 제시한 것뿐이다.

이것이 진정한 교감의 시대로 접어드는 방법은 아닐까 한다.
저작권자 © 중부매일 - 충청권 대표 뉴스 플랫폼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