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90년대 한국영화계에는 급격한 세대교체가 이루어졌다. 영화를 전문적으로 공부하고 현장에 뛰어든 젊은 인력들에 의해 충무로의 전통적 도제시스템은 유명무실해졌고, 새 감각과 경영논리를 갖춘 젊은 프로듀서들은 한국영화의 지형 자체를 변화시켰다.
 이에 따라 90년대 중후반에서 최근에 이르기까지 한 해 영화계를 결산하는 자리에서 주목을 끄는 건 대부분 신인감독들이었다.
 또한 데뷔작이나 한두편을 만들었을 뿐인 젊은 감독들이 영화계 판도를 좌지우지하게 된 세대교체의 흐름은 80년대 괄목할만한 결과물을 만들어냈던 중견감독 다수를 대열에서 낙오시켰다. 일부는 현장에 남아있었지만 현격히 위축됐고 나머지는 아예 영화판을 떠나버렸다.
 이같은 중견감독들의 실패와 부재는 젊은 감독들이 미치지 못하는 깊이와 너비에 대한 안타까움을 강화시켰다. 이는 또 역으로 한국영화의 왜소화·파편화경향을 심화시키는 원인으로도 지적됐다.
 그런데 끊어졌던 국토 허리를 경의선철도가 잇게됐듯, 한국영화계에서도 세대간 단절을 복구시켜줄 「과거의 인물들」이 속속 돌아오고 있어 주목된다.
 「고래사냥」「깊고 푸른 밤」「황진이」 등을 통해 상업영화 진영에서도 고유의 작가주의적 색채를 드러냈던 배창호감독은 지금 「흑수선」을 찍고있다. 안성기, 이정재, 이미연, 정준호 등이 출연하는 40억원 규모의 블록버스터급 대작이다.
 「바보선언」의 형식실험과 「바람 불어 좋은 날」의 사회적 발언, 「무릎과 무릎 사이」의 흥행성 등 이질적 요소들을 아우르며 80년대를 대표했던 이장호 감독은 「행복」이라는 멜러드라마 제작을 밝혔다. 대학교수, 전주시 영상위원회 운영위원장 등으로 외도한지 6년만의 일.
 무려 11년만에 메카폰을 잡는 이는 84년 「땡볕」을 베를린 본선에 진출시켰던 하명중감독으로 사회고발성 법정 드라마인 「피넘브라」(가제)가 그의 컴백작품이다.
 물론 어느덧 노장(老將)으로 까지 불리게 된 이들의 귀환이 낙관적인 것만은 아니다. 시장의 외면을 받았거나 오랜세월 동안 메가폰을 들지 않았던 이들이 어떻게 21세기의 호흡을 제대로 포착할 것인가 의구심이 드는 것도 당연하다.
 하지만 이들의 차기작 구상은 침체와 소외, 혹은 자기번민의 시간이었을 지난 공백기가 보다 성숙한 영화작업의 토대가 될 것이라는 기대를 품게 한다.
 우선 저예산·개인투자방식인 「러브스토리」「정」으로 비주류를 고수했던 배창호감독은 「흑수선」을 통해 「대중작가」로서의 위상재구축을 노리고 있다.
 충무로 자본의 제약으로부터 자유롭기 위해 비주류를 선택했지만 관객과의 소통에서 딜레머를 겪어야했던 그의 이번 선택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적극적으로 「시장」에 뛰어들겠다는 전투적 의지가 읽히기 때문이다.
 더욱이 「흑수선」은 분단의 질곡이 잉태한 비극을 소재로 반세기의 배경을 아우르는 액션 스릴러물. 자신의 방식대로 스타들을 총출동시켜 흥행성을 높이되, 현실적 맥락을 감싸안는 거대서사를 통해 작가적 비전을 제시하겠다는 양수겸장의 의지도 엿보인다.
 제작사 대표, 극장경영주로 10년 세월을 보낸 하명중 감독의 퇴임변은 더욱 주목할만 하다. 「피넘브라」와 함께 차차기작으로 「명성황후」를 원작으로 하는 「엠브리스」 제작도 밝힌 그는 4,5편의 영화들이 준비돼있다며 앞으로 1년에 1편씩 영화를 만들겠다고 포부를 밝혔다.
 「피넘브라」에서 우리나라의 썩은 정치판, 기득권 세력과 맞서 싸우는 영웅을 그리겠다는 그는 자신을 후반에 들어선 선수로 비유하며, 전반 탐색전에서 많이 배웠으니까 침착하게 경기에 임할 것을 다짐하고 있다.
 이들 80년대 감독들의 귀환은 선 굵은 이야기, 과거를 돌아보고 미래를 내다보는 큰 이야기를 다시 선보이리라는 기대 때문에도 더욱 반갑다. 젊은 사람들보다 더 젊게 갈 자신이 있다는 하명중감독의 장담이 허언(虛言)으로 그치지 않는다면 신·구세대의 상승작용을 통해 더욱 넓어지고 깊어지는 한국영화의 미래를 기대할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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