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순신의 가문을 둘러싼 오해와 진실
이순신의 가문을 둘러싼 오해와 진실
  • 중부매일
  • 승인 2012.04.19 20: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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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 이순신처럼 일하라 ⑫

<2> 이순신 집안은 부자였을까, 가난했을까

얼마 전 어느 이순신 연구자가 '이순신이 아산으로 이사 왔을 당시, 그의 집안은 결코 가난하지 않았다'는 연구 결과를 발표했다. 그는 "이순신이 둘째 형 요신과 함께 모친 초계 변씨로부터 충남 은진(恩津)지방의 가옥과 토지, 사노비 7~8명을 증여받았다는 기록이 있다"는 것을 근거로 제시했다.

나는 그의 얘기를 들으면서 상식적인 차원에서 몇 가지 의문을 가져 보았다. 역사 연구에 있어서 내가 가장 중시하는 것은 상식(常識)이다.

왜냐하면 상식을 벗어난 역사 기술은 허구일 가능성이 매우 높기 때문이다. 일례로 660년 백제가 망할 당시, 의자왕이 거느린 궁녀 수가 3천명이었다고 한다. 과연 그것이 맞는 얘기일까? 나는 아니라고 단언한다. 그 근거는 중국 북경의 자금성에서 찾아볼 수 있다.

자금성의 대지면적은 약 75만평이고, 그곳에서 살았던 궁녀 수는 약 9천여명이었다고 한다. 그러면 660년에 의자왕이 살았던 부여 부소산성의 대지면적은 얼마였을까? 모르긴 해도 1만평을 넘지 않았을 것이다. 그렇다면 궁녀 수는? 그것을 구하기 위해서는 부등식(75만평 : 9천명 = 1만평 : X명)을 풀어야 한다. X를 풀면 120명 정도로 추정된다. 그것이 바로 내가 강조하는 상식이다. 실제로 2002년에 KBS 역사스페셜은 '백제의 3천 궁녀는 허구였다.'는 것을 방영했다.

'이순신 집안이 가난하지 않았다'는 주장에 대한 3가지 반론

첫째, 옛날 속담에 '겉보리 서 말만 있어도 처가살이는 안한다'는 말이 있다. 이 속담은 그것이 통용되었을 때의 사회상을 반영한 것이다. 고려 시대나 조선 시대 초기에는 부모 유산을 상속 받는데 있어서 아들과 딸을 차별하지 않고 균등 분배했다.

또한 조상에 대한 제사도 자녀들끼리 돌아가면서 모시는 윤회봉사(輪回奉祀)를 했다.

그러나 조선 시대 중기에 접어들면서 제사의 책임과 유산 상속은 장자우선의 원칙에 따라 맏아들에게 집중되었다. 그것은 성리학의 교조주의가 심화된데 따른 것이다. 오랫동안 가족과 가문 내에서 당당한 위치를 차지했던 딸들의 위상은 한순간에 '출가외인(出嫁外人)'으로 급전 직하했다.

이런 상황에서 남성들이 처갓집을 좋아하고, 처가살이를 반겼을 이유가 없다. 처가살이를 해봤자 머슴처럼 일만 부려먹을 뿐, 자신에게 돌아올 경제적 혜택이 거의 없기 때문이다. '화장실과 처갓집은 멀수록 좋다'는 조선 시대 남성들의 푸념은 그러한 사회상을 반영한 것이라고 본다.

이는 이순신 모친인 초계 변씨의 경우도 예외는 아니었다. 즉 초계 변씨의 몫으로 배정된 친정 재산은 거의 없었거나 설령 있었다고 해도 그리 많지 않았을 것이다.

둘째, 이순신의 부친 이정(李貞)이 아산으로 내려왔다는 것은 곧 주류사회로부터의 이탈을 의미한다. 예나 지금이나 일단 서울을 벗어나면 재진입이 결코 쉽지 않다. 일례로 지방의 대형 아파트를 판다 해도 서울 강남의 아파트 전세금에 턱없이 부족하다.

당시 이순신이 살았던 지역은 고관대작들이 즐비했던 고급 주택지역이었다. 요즘으로 치자면 서울 강남의 대치동이나 강북의 평창동 일대가 될 것이다. 더욱이 이정은 자기 집안의 번성을 기원하며 중국 왕들의 이름(복희씨, 요왕, 순왕, 우왕)을 따서 네 아들의 이름을 지어주었던 사람이다.

그런 그가 자녀교육의 요람인 서울의 이점(利點)을 포기했다는 것은 무언가 절박한 속사정이 있었음을 시사한다. 즉 자신의 경제력으로는 서울에서 제일가는 부촌(富村)동네의 소비수준을 감당할 수 없었기 때문이 아닐까?

셋째, 이순신 집안도 증조부 이거 때까지는 상당한 부(富)를 축적했을 것으로 사료된다. 조부 이백록도 부친 이거가 남겨준 유산으로 한동안은 윤택한 경제생활을 영위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정 때는 가정경제가 이전보다 악화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그의 부친 이백록이 종8품의 낮은 벼슬을 한데다 그것도 일찍 그만두었고, 이정 본인도 관직에 나가지 않고 백두(白頭)의 삶을 살았기 때문이다.

이것은 유성룡의 ≪징비록≫을 통해 확인 가능하다. 그는 ≪징비록≫에서 '이순신의 조부 이백록은 가문의 음덕에 힘입어 작은 벼슬이라도 했지만 부친 이정은 벼슬에 오르지 않았다'라고 밝혔다.

따라서 이정의 서울 생활은 조상들이 물려준 유산에만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초계 변씨의 삯바느질 얘기가 등장하는 것도 그와 무관하지 않다.

돈의 속성은 시대에 관계없이 비슷하다. 즉 '부(富)를 쌓는 데는 여러 선대(先代)의 피나는 노력이 필요하지만, 쌓은 부를 없애는 데는 채 3대도 걸리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이런 논리는 이순신 집안에도 그대로 적용되었다. 더구나 이순신이 살았던 서울 동네는 부촌(富村)이었고, 그곳 사람들의 소비수준이 다른 지역보다 월등히 높았기 때문에 부의 고갈(枯渴) 속도 역시 무척 빨랐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러한 일련의 상황들을 고려해볼 때, 아산으로 내려올 당시의 이순신 집안은 선대들 때보다 한미(寒微)한 수준으로 전락했다고 말할 수 있다.

즉 가정 경제의 사정이 그리 좋지 않았던 것이다. 나는 이것이 어느 이순신 연구자가 제시한 근거자료보다 훨씬 더 설득력이 있는 상식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내가 제시한 상식이 100% 완벽한 것이라고 단언할 용기는 없다.

이순신 집안의 터닝 포인트는 방씨부인과의 결혼에서 시작되었다!

이순신은 21세가 되던 해인 1565년에 상주 방씨와 결혼했다.

그런데 한 가지 놀라운 것은 한미한 집안의 청년인 이순신 결혼에 당시 병조판서였던 동고(東皐) 이준경(1499~1572년)이 적극적으로 중매를 섰다는 사실이다. 그 바람에 이순신은 방진의 사위가 될 수 있었다.

이준경은 성종이 폐비 윤씨에게 사약을 내렸을 때, 그 사약을 들고 갔던 승지 이세좌의 손자였다. 이세좌는 약관(藥官)의 임무를 완벽하게 수행한 공로로 성종시절에는 승승장구했지만, 결국 연산군이 왕위에 오르면서 멸문지화를 겪게 된다.

연산군은 1504년 4월 9일 이세좌에게 "목을 매서 자살하라"는 어명을 내렸고, 5월 4일에는 그의 네아들(수원, 수형, 수의, 수정)을 교수형에 처했다.

가까스로 목숨을 부지했던 이준경은 이수정의 아들이었다. 만약 1506년에 중종반정이 일어나지 않았다면 그도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을 것이며, 조선의 운명도 크게 달라졌을 것이다.

이준경은 조선의 제13대 임금이었던 명종이 후사(後嗣) 없이 죽어 왕실의 적통이 끊기자 왕비인 인순왕후 심씨와 논의해서 중종의 후궁이었던 창빈 안씨의 손자 하성군 이균을 새로운 임금으로 추대했던 인물이었다. 그 임금이 다름 아닌 선조였다.

그런 이준경이 아산에 머물고 있던 이순신을 어떻게 알았으며, 또 보성군수를 역임한 방진과는 어떤 인연이 있었기에 이순신을 그에게 소개시켜 주었을까? ≪이충무공전서≫와 ≪이순신세가≫를 비롯한 관련 책자나 인터넷 공간에서 찾아볼 수 있는 단서는 극히 제한적이다.

즉 '이준경은 이순신이 10대 중·후반 때 서울 친구들에게 한문공부를 시키는 것을 우연히 발견하고 그에게 관심을 가졌다', '이준경과 방진은 동문수학을 했으며, 이준경이 병조판서로 재직할 때 그의 휘하에서 근무했다'는 것이 전부다.

아무튼 이순신은 이준경의 적극적인 추천에 힘입어 방진의 무남독녀 외동딸과 결혼할 수 있었다. 당시 방진은 아산 인근지역에 경제적 기반을 갖고 있던 큰 부자였다. 방진의 데릴사위가 된 이순신은 그의 정신적 격려와 경제적 후원 속에 1566년부터 무과시험을 본격적으로 준비했다. 그리고 10년만인 1576년 2월에 치러진 무과 시험에서 급제했다.

한편, 장인어른 방진과 장모 남양 홍씨가 사망하자 그들 부부의 모든 경제적 기반은 사위였던 이순신에게 상속되었고, 그로인해 이순신은 큰 부자가 될 수 있었다. 그 근거는 1594년 1월 14일자 ≪난중일기≫에서 찾아볼 수 있다.

'(중략) ...설날 아산 산소에서 제사를 지내는데 떠돌아다니는 사람들이 무려 200여명이나 산을 둘러싸고 음식을 달라고 덤벼들었다고 했다. 놀라운 일이다'

결론적으로 여러 전후 사정을 고려할 때, 이순신 집안의 경제력은 방씨부인과의 결혼을 기점으로 크게 증가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


# 김덕수 교수는

▶공주대 사범대학 사회교육과 교수

▶청주고, 충북대 경제학과 졸업, 고려대 대학원 석사· 경제학 박사

▶'김덕수 교수의 통쾌한 경제학' '김덕수 교수의 경제 EQ 높이기' '맨주먹의 CEO 이순신에게 배워라' 등 16권 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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