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을 열며] 정문섭 논설위원

김삿갓은 조선 시대의 방랑시인 김병연(1807~1863)의 속칭이다.

김병연은 생전에 전국을 떠돌아다니며 즉흥 풍자시를 많이 지었는데 그가 방랑시인이 된 내력은 이렇다.

때는 조선 순조11년(1811년) 홍경래는 서북인 (西北人)을 관직에 등용하지 않는 조정정책과 탐관오리들의 행각에 분노하여 난을 일으켰다. 반란군은 순식간에 가산, 박천, 곽산, 태천, 정주등지를 파죽지세로 휩쓸었다.

이 과정에서 가산 군수 정시(鄭蓍)는 문관의 신분이었지만 최후까지 싸우다 장렬하게 전사했다. 반면 김병연의 할아버지 김익순(金益淳)은 관직이 높은 선천 방어사였지만 반란군에게 잡혀 항복했다.

반란이 평정된 이듬해 김익순은 결국 사형을 당한다. 이때 손자 병하 병연은 여섯 살, 여덟 살이었다.

김익순이 데리고 있던 종복(從僕) 김성수(金聖秀)는 황해도 곡산에 있는 자기 집으로 병하, 병연 형제를 데리고 가서 글공부를 시켜 주었는데 특히 병연의 문장능력이 뛰어났다고 한다.

부친이 화병으로 죽자 홀어머니 함평 이씨는 두 형제를 데리고 강원도 영월군 영월읍 삼옥리로 이사했다.

1826년 김병연은 스무 살이 되던 해에 영월 읍내의 동헌 뜰에서 열리는 백일장 대회에 나갔다가 장원했다.

그는 당시 시제(詩題)인 '논정가산 충절사 탄김익순 죄통우천'(論鄭嘉山 忠節死 嘆金益淳 罪通于天)가 나오자 가산군수의 충절을 찬양하면서 김익순의 불충을 추상같이 꾸짖는 글을 썼다.

김병연이 이 글로 장원을 하자 어머니는 만고의 역적으로 몰아세운 김익순이 그의 친할아버지였음을 털어놓는다.

자신이 꾸짖은 사람이 할아버지였음을 알게 된 그는 이때부터 죽장에 삿갓을 쓰고 방랑생활을 시작한다.

한 번은 김삿갓이 어느 서당에 들러 하룻밤 묵어가기를 청하는데 서당훈장이 야박하게 거절하자 즉흥시를 읊조렸다.

'서당내조지(書堂乃早知)요, 방중개존물(房中皆尊物)이라, 생도제미십(生徒諸未十)이요, 선생내불알(先生來不謁)이라.'(서당을 일찍이 알고 찾아보니, 방 안엔 모두 귀한 분들뿐이네, 학생은 채 열 명이 안 되는데, 선생은 나와 보지도 않네.)

이를 듣고 훈장이 욕을 했다고 하자 화를 내자 풀어준 '욕설모서당'(辱說某書堂)이라는 풍자시는 해석해보니 아주 점잖은 내용이었다.

그러나 뒷부분의 3음절은 걸쭉한 육두문자임은 한 눈에 들어온다.

이종걸 민주통합당 최고위원이 지난 5일 자신의 트위터에 새누리당 유력 대권주자인 박근혜 전 비대위원장을 '그년'이라고 표현해 논란이 되고 있다.

이 의원은 새누리당 공천헌금 파문을 거론하며 '장사의 수지 계산은 주인에게 돌아가며, 그들의 주인은 박근혜 의원인데 '그년' 서슬이 퍼래서 사과도 않고 얼렁뚱땅...'이라고 적었던 것이다.

새누리당이 이를 문제 삼자 그는 "'그년'은 '그녀는'의 줄임말이므로 같은 말"이라고 반박했다. 그러다 여론이 불리하게 돌아가자 "오타가 난 것"이라고 사과하고 나중에는 유감표명까지 했다.

그래도 '그년' 파문은 좀처럼 가라앉지 않는 분위기이다.

결국 인터넷은 관련된 패러디 풍자가 봇물을 이루면서 그는 되로 줬다가 말로 받고 있었다.

"이종걸 아내 그년 이 더위에 안녕하십니까?", "이종걸 애미 그년 자식을 잘 낳았네."

모두들 구름처럼 머물다 바람처럼 떠날 인생길이다.

상대의 역린(逆鱗)을 건드렸다가 본인까지 무너지는 자충수를 둘 필요가 있을까?
저작권자 © 중부매일 - 충청권 대표 뉴스 플랫폼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