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20세기를 말하다 <60> 1970년대 미국<3> '아이스 스톰'(리 안, 1997)

압도적 표차로 재임에 성공한 닉슨 대통령은 1973년 취임 첫 해를 맞았다. 1월 27일 파리에서 베트남전쟁의 종결과 평화 회복에 관한 협정 및 4개 부속 문서에 서명한 미국은 3월 27일 포로 교환의 완료와 더불어 베트남에서 철수했다.

5월부터는 상원 주최 워터게이트 청문회가 열렸으며, 10월 워터게이트 특별 검사를 전격 해임한 닉슨은 민심의 역풍을 자초했다. 10월 6일부터 시작된 아랍과 이스라엘간의 중동전쟁이 석유를 무기로 앞세운 석유전쟁으로 비화되면서 미국의 경제 또한 심각한 위기상황을 맞았다. 닉 무디의 원작을 리 안이 영화화한 1997년 작품 '아이스 스톰'은 위기의식과 불안이 감도는 1973년 미국의 풍경을 스산하게 그려낸다.

코네티컷주 뉴케이넌에 사는 벤(케빈 클라인)과 엘레나(조안 앨런)는 뉴욕 사립고에 다니는 아들 폴(토비 맥과이어)과, 2년 터울의 딸 웬디(크리스티나 리치)를 두었다. 벤 부부는 친구이자 이웃인 짐(제이미 셰리단), 제이니(시고니 위버) 부부와 자주 교류하는데, 웬디도 동갑인 마이키(엘리야 우드)와 그의 남동생 샌디(아담 한 버드)와 무시로 어울린다. 추수감사절을 맞아 폴이 집으로 오고, 벤 부부는 짐 부부와 함께 이웃의 파티에 초청받는다.

벤 가족의 4인용 식탁이 오랜만에 꽉 찬다. 커다란 칠면조 요리를 앞에 두고 온 가족이 감사의 기도를 드리는 시간. '스위트 홈'을 선전하는 장면으로 썩 어울릴 법도 한데, 분위기는 썰렁하다 못해 스산하다. "인디언이 학대받고 베트남은 굶주려도 우린 배 터지게 잘 먹고 있으니, 물질적 풍요를 준 하나님께 감사한다."는 웬디의 기도문은 열네 살 소녀의 것이라기엔 지나치게 냉소적이고 과격하다. 하지만 청소년기의 열정이 만든 치기어린 냉소보다 더 위험하고 위태로운 게 이 가족에 있다.

그렇다면, 과연 무엇이 문제인가. "맛있는 음식도 먹고, 어리광도 피우고 그랬으면 좋겠구나." 귀가를 앞둔 아들과의 통화에서 살짝 들뜬 얼굴이나 "걱정이 있으면 언제든지 내게 이야기하라."고 말하는 벤의 말은 그가 '좋은 아버지'의 열망을 포기하지 않았음을 드러낸다. '화목한 가정'을 꿈꾼다면 필수불가결한 바로 그것. 그러나 벤은 이미 알고 있다. 그 꿈은 결코 이루어질 수 없다는 것을. 그래서 곧 화들짝 놀라 자신의 말을 취소하고야 만다. "지금까지 얘기들, 없던 일로 해줄래?"



바야흐로 가족은 이미 금 가버린 도자기, 혹은 상온에 방치된 얼음조각 같은 상태다. 결혼 17년차, 무의미한 관계의 권태에 지쳐버린 욕망으로 벤은 제이니와의 성적쾌락에 집착한다. 남편의 외도는 이미 명백한데도 엘레나는 사실의 인지를 끝까지 유예하고자 한다. 자전거를 타며 귓가에 스쳐가는 바람을 느끼고, 화장품을 훔치고, 혹은 책 속으로 도피한다. 짐 또한 일중독으로 불안을 숨기려는데, 제이니의 심드렁한 얼굴에서도 불륜의 짜릿한 쾌감은 사라진 지 오래다.

그러니 아이들은 모두 알고 있다. 아빠가 즐거운 척하고 엄마는 침묵하는 이 숨 막힐 듯한 시간이 곧 파국에 다다를 것임을. 세간의 화제라는 포르노물과 '키 파티' 이야기에 열중하는 어른들 대화를 귀동냥하며 아이들 또한 어른들이 도착한 막다른 골목에서 함께 서성인다. 벤과 제이니가 물침대에서 권태로울 뿐인 혼외정사에 몰두할 때 웬디와 마이키도 섹스에 대한 호기심을 푼다. 결혼의 서약을 잠정적으로 무효화시키는 합의하에 어른들의 '키 파티' 긴장이 최고조에 달할 때, 웬디와 샌디는 알몸인 채 함께 잠을 청한다.

진퇴양난의 교착상태, 어른들의 혼돈과 열패감이 다음 세대로 이어지는 와중에 아버지-어른들이 할 수 있는 건 "할 말이 없다"는 패배 선언뿐이다. 희망과 이상에 대한 달뜬 열정으로 1960년대를 통과했지만 1970년대의 그들을 기다리는 건 거짓과 위증, 은폐와 음모의 악순환 속으로 자멸하는 워터게이트 스캔들과 닉슨이었다. '부도덕한 전쟁'에서의 패배는 쉽게 아물지 않을 상처를 미국사회에 남겼다. 오일쇼크까지 더한 1973년의 추수감사절은 그렇게 황량하고 스산하다.



그리고 마치 소돔과 고모라에 내려진 징벌처럼 아이스 스톰이 찾아온다. 미국의 동북부를 얼려버린 착빙성 폭풍우의 괴력은 곧 더 이상 숨길 수 없는 파국 그 자체의 폭력적 민낯이기도 하다. 그 밤, 벤의 가족들은 남의 집 화장실과 이웃집 남자의 차, 아버지가 혼외정사를 펼치던 이웃집 침대, 멈춰버린 기차에서 각각 혹독한 시간을 견뎌낸다. 그리고 아이스 스톰은 부모가 지키지 않는 집을 나와 '분자들의 활동이 멈추는 가장 깨끗한 순간'을 만끽하던 마이키를 속죄의 제물로 앗아간다.

따라서 영화의 마지막이 무성영화처럼 진행되는 건 타당하거니와 필연적인 것이기도 하다. '아이스 스톰'은 무거운 침묵을 깨뜨리는 아버지들의 울음소리로 끝맺는다. 차갑게 굳어버린 아들 마이크를 부여안은 짐과, 무사히 돌아온 폴과 가족들을 백미러로 훑어보던 벤의 울음. 하지만 그럼에도 살아남은 자들의 남은 시간들에서 희망과 화해의 실마리를 찾기란 힘들다. 그만큼 지난밤은 혹독하기 그지없는 악몽이었다. / 박인영·영화 칼럼니스트

이 기사는 한국언론진흥재단 지원으로 게재됩니다

키워드

#연재
저작권자 © 중부매일 - 충청권 대표 뉴스 플랫폼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