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북의 무형문화재 이야기] <3> 농악과 농요

논농사는 과학이었다. 일의 과정과 동작을 가락과 적절하게 배합해 피로를 잊게 해주었으며 흥을 돋우었고 풍년을 기원했다. 모찌는 소리, 모심는 소리, 초벌매기 노래, 두벌매기 노래에는 조상들의 지혜가 담겨 있었다.

지금이야 사람 손 대신 기계의 힘을 빌리는 일이 많아졌지만 벼농사를 중요하게 생각하던 과거에는 농사를 지으며 부르던 노래가 발달했었다.

여전히 몇몇 지역에서는 농요를 부르며 농사짓는 일을 전통으로 가꾸고 있다. 우리 민요는 성격에 따라 다양한 형태로 구전돼 왔다.

농사지을 때 부르는 들노래에는 노동의 시름이 녹아 있고 삶의 애환이 서린 아리랑에는 저마다 간직한 뼈아픈 사연이 깃들어 있다.

논농사를 지을 때는 단계마다 노래가 달랐고, 계절이 바뀔 때에는 달거리 선소리를 부르며 농사일의 우선순위를 깨우쳤다. 질박한 삶의 소리에 희망을 섞고, 서로서로 위로할 양으로 부른 노래가 농요였고 아리랑이었으며 민요였다.

▲ 진천 용몽리농요 시연


충북에는 모두 3개 지역의 농요가 무형문화재로 지정돼 있다. 충청북도 무형문화재 5호인 충주시 신니면 마수리의 '중원 마수리농요', 도지정 무형문화재 6호인 영동군 영동읍 설계리의 '영동 설계리농요', 도지정 무형문화재 11호로 지정된 진천군 덕산면 용몽리의 '진천 용몽리농요'가 그것이다.

이들 농요는 좁게는 농사일을, 넓게는 삶을 위로한 가락이었다. 농사에서 빠질 수 없는 또 하나의 집단적 유희(遊戱)이자 제의(祭儀)를 꼽으라면 농악을 빼놓을 수 없다.

농악과 농요는 논 일을 하며 고단해진 심신을 위로하고 격려하기 위한 풍류라는 점에서는 일맥 상통하지만 악기를 이용해 흥을 돋우는 농악과 달리 사람의 소리로 표현되는 농요는 구성지고 애잔한 것이 특징이다. 충북의 농요와 충청북도 무형문화재 1호인 청주농악에 대해 알아본다.

▲ 청주시 지동동에서 청주농악 재현 모습


상쇠의 신명은 기죽지 않았다

■ 청주농악

까치걸음 칠채가락 신명의 회오리 바람/ 들녘의 한 모퉁이 지신을 달래고 있다/ 등잔 속 수심의 길쌈 청주댁의 한풀이/ 중모리 중중모리 휘모리로 달구는 마당/ 왕산악 우륵 박연 백결선생 듣던 가락/ 청아한 편이 떨면서 풀어가는 천년의 말/ 꽹과리 세마치 장단 사직벌을 다 적신다/ 우암산도 울렁울렁 무심천도 출렁출렁/ 쇠소리 소지를 먹여 상령산을 오른다. -임병무의 시조 '청주농악'

다른 지방 농악과 달리 장단이 빨라 생동감을 주는 청주농악의 신명을 이렇게 구수하게 표현한 글이 또 있을까 싶다.

이 시조에서 작가는 '타악기의 오묘한 합창, 어깨 짓을 하며 들썩이는 사람들, 청솔가지를 스치는 부드러운 바람이 중모리라면 폭풍우로 몰아쳐 용트림으로 굿판을 몰고 가는 것은 중중몰이와 휘몰이'라고 표현했다. 청주농악의 가락과 신명을 함축적으로 보여주는 시조에서는 장단 속에 깃들어 있는 민족의 정기와 예술의 생명력이 생생하게 전해진다.

청주농악은 충청북도의 무형문화재 기록화 사업 첫 대상이기도 했다. 민속학자 김영진 전 청주대 교수가 이 작업을 맡아 진행했다. 김 전 교수는 청주농악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농악의 종류부터 분명히 해 둘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그에 따르면 청주농악은 전통농악으로서의 두레농악, 명절농악, 걸립농악과 현대농악으로서의 연예농악으로 분류된다. 여기까지는 기능적 분류. 오늘날에는 모두 전승되지 않는 옛날 전통농악이고 지금은 공연농악인 연예농악만 연희되고 있다고 설명했다.

청주농악의 상쇠는 청주시 지동동에서 어린시절부터 농악을 익혀온 기능보유자 이종환 옹이다. 어려서 꽹과리를 치는 아버지의 영향을 받아 동네 농악판이 있으면 시간가는 줄 모르고 따라다녔다. 소리나는 양철을 두드려보기도 하고 농악대를 따라다니며 밥도 얻어 먹고 꽹과리를 들고 쳐보기도 했다.

그 소리가 듣기 좋았는지 동네 사람들은 일찍 돌아가신 아버지의 피를 닮았다고 했다. 스물일곱살 때부터 여든이 넘어서까지 상쇠노릇을 했다. 사람들은 그를 두고 '제비같이 노는 사람'이라고 치켜세웠다.

무형문화재가 된 것은 69세때인 1992년. 청주농악보존회 농악대 상쇠로 활동하고 전국 대회에서 여러차례 개인상도 수상했지만 지금은 그의 특기인 상모를 돌리는 부포놀음과 앉았다 일어서는 까치걸음을 할 수 없어 아쉽기만 하다.

이제는 연예농악으로만 전승되고 있지만 청주농악의 신명은 여전히 살아있다. 이름난 상쇠의 몸은 마음을 배반했지만 이종환 옹의 전승활동에 대한 애정과 열정은 지금도 끈끈하다. 그는 명성을 듣고 찾아오는 이들에게 '농악은 배우는 것이지 가르치는 것이 아니다'며 어울려 함께 하는 교육을 실천하고 있다.

▲ 중원 마수리농요 재현 행사 모습


고단해도 '아라리야 아라리요'

■ 중원 마수리농요

충주 가섭산 동쪽에 위치한 신니면 마수리에는 구전으로 내려오는 농요가 있다. 농사를 지으며 풍년을 기원했던 중원 마수리농요. 1972년 제13회 전국민속예술경연대회에서 대통령상을 수상하며 이름을 알렸다.

무형문화재로 지정된 것은 1994년 12월. 지금은 고인이 된 지남기 옹이 기능보유자로 지정되었다가 세상을 뜨자 2007년 박재석(56) 씨가 뒤를 잇고 있다.

마수리는 마을형상이 말발굽을 닮았다고 해서 마제마을이라고도 불렸다. 남한강과 가섭산을 안산으로 옆에는 요도천이 달천강과 합류하고 갬보들, 새들, 검은들, 모시래들 등 넓은 들이 펼쳐져 있는 전통적인 농경마을이다.

마수리농요는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기억에서 멀어지다가 1970년 발굴되어 지금에 이르고 있다. 중원 마수리농요는 농사를 지을 때 부르던 모찌기노래(절우자), 모심기노래(아라성), 김매기노래(긴방아, 중거리방아, 자진방아)로 구성돼 있는데 두벌김매기 노래는 풍년을 기원하는 대허리로 흥겨움을 더한다.

중원 마수리농요의 모찌기노래는 '절우자'라고도 부르는데 선소리꾼이 메기는 소리를 하면 다른 일꾼들이 '절우자~절우자~이모자리를~절우자'라고 받는 소리를 한다. 모심기 노래를 '아라성'이라고 한 것도 후렴구와 관련이 있다. 아라성의 후렴구는 '아라리야 아라리요 아리랑 얼싸 아라성아'로 불린다.

이외에도 여자들이 중심이 되어, 추수한 벼를 탈곡하는 과정에서 불렀던 방아찧기 노래가 긴 방아타령과 자진방아타령으로 이어지고 있다.

▲ 영동 설계리농요 시연 모습


노동 시름 위로했던 영동 가락

■ 영동 설계리농요

영동 설계리 농요는 조선말엽부터 부르던 노래로 추정된다. 농사일을 하면서 노래 한 곡조에 시름을 달래고 피로를 풀었던 농민들의 애환이 담겨 있다. 설계리 농요는 지난 1975년 제16회 전국민속예술경연대회에 출연해 대통령상을 수상하면서 주목을 받았다.

이후 1996년 1월에는 충청북도 무형문화재 6호로 지정돼 2008년 7월 설계리 농요 전수관이 건립된다. 서병종(81) 옹이 기능보유자로 활동하고 있다.

▲ 영동 설계리농요 시연
노래의 현장을 잃어가는 노동요 가운데서도 설계리농요는 그 전통성을 가장 잘 유지하고 있는 농요로 꼽힌다. 설계리 농요는 크게 2부로 구성돼 있는데 1부는 논농사 단계에 따라 모찌는 소리, 모심는 소리, 초벌매기 소리, 두벌매기 소리로 구성돼 있다.

논농사의 단계별 소리는 이렇다. 우선 모찌는 소리. 못자리나 모판에서 모를 뽑아 일정한 크기의 단으로 묶어 내면서 부르는 소리인데 모심는 소리와 가락이 비슷해 가사만 바꿔 부르고 있다.

보통 농요는 선소리꾼이 앞에서 메기는 소리를 하면 나머지 사람들이 같은 가락과 사설로 받는 소리를 하는 '메기고 받는 형식'이지만 설계리농요의 모찌는 소리는 선소리꾼이 메기는 소리를 하면 거기에 걸 맞는 사설을 만들어 대꾸하듯이 부르는 '교환창' 방식을 택하고 있다.

모심는 소리는 모판에서 쪄낸 모를 논에 옮겨 심으면서 부르는 소리로 가창방식은 교환창이다. 초벌매기 소리는 '아시매기'라고도 하는데 논의 잡초를 호미로 매면서 부르는 소리다. 두벌매기는 초벌매기를 한 후에 논에 물을 대 두었다가 논의 흙이 부드러워지면 물이 자질자질하게 잠길 정도만 남겨놓고 손으로 저으며 매는 것을 말한다. 일의 속도만큼이나 노래도 빠른 것이 특징이다.

설계리농요 2부는 부녀자들이 불렀던 길쌈노래로 이루어져 있다. 길쌈노래는 씨앗는 노래, 명타는 노래, 물레노래, 개떡노래, 방아타령, 베틀노래로 구성돼 있는데 여럿이 모여앉아 노래를 부르며 길쌈을 했던 영동지역 아낙들의 질박한 삶을 위로하는 가락이었다.

입말이 작품이 되기까지

■ 진천 용몽리농요

용몽리 농요가 복원된 것은 1999년이다. 지역 방송국과 함께 초평아리랑 촬영을 위해 진천의 이정수 옹을 찾았던 민속학자가 농요 조사를 시작하며 몇백년 전부터 전해 내려오던 진천 용몽리 농요가 세상의 빛을 보게 됐다.

1999년은 충청북도민속예술경연대회가 진천에서 개최되는 해였다. 마침 출품작을 찾고 있던 진천군으로서는 용몽리 농요 복원이 반가운 소식이었고, 농요단 창단은 속전속결로 이뤄졌다. 사십여년간 입말에 익숙한 이정수 옹이 십여 페이지 분량의 농요를 정리하면서 진천 용몽리농요의 첫 작품이 탄생하게 된다.

▲ 이정수 진천 용몽리농요 선소리꾼


그렇게 정리된 사설을 바탕으로 민속예술경연대회를 준비하게 됐고 그해 수상의 영예까지 안을 수 있었다. 충북에서는 가장 늦게 무형문화재가 됐지만 기능 보유자들은 어려서부터 배워온 농요의 복원이 뿌듯하기만 하다.

진천 용몽리농요는 다른 지역과 달리 온전한 논농사 소리로 구성돼 있는데 모찌는 소리, 모심는 소리, 논매는 소리, 논뜯는 소리 네 가지로 구분하고 있다. 모찌는 소리는 모내기 전에 모판에서 모를 뽑아 단으로 묶으며 부르는 노래. 벼농사의 첫단계이기 때문에 가을 추수의 풍작을 기원하는 내용이 담겨 있다. 작업을 원활하게 하기 위해서 선소리를 하면 뒷소리를 받았는데 '뭉-치세-뭉-치세-어히야 이모판 뭉치세'라는 노랫가락이 선소리로 불렸다.

모심는 소리는 모판에서 쪄낸 모를 논에 옮겨 심으며 부르는 노래로, 딸을 키워 출가시키듯 자식이 잘 살기를 바라는 부모 마음을 담아 불렀다고 전해진다. 선소리는 이렇다. '야기도-허하나-에하-저기도-또하나 여기도 심드라고 삼백출자리로 심어주소/ 야-기도-허하나-에하-저기도 또-하나'

논은 보통 세 번을 매기 때문에 초벌, 두벌, 세벌에 따라 소리가 달랐으나 용몽리에서는 논매는 소리로 묶어 전승하고 있다. 논농사에서 불렀던 마지막 농요는 논뜯는 소리. 풍년과 효친의 마음을 담아 부른 것으로 전해진다. / 김정미

warm@jbnews.com


※자료협조 : 충청북도문화재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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