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로거 기자단-햇빛창공] 태풍 쓸고간 자리 이제는 풍요로운 가을 준비

오랜만에 준하와 늙은 사과나무 아래를 걸었습니다. 가벼운 마음으로 아이의 손을 잡고 깔깔대며 사과밭을 걸어보는 것이 얼마만일까요. 모처럼 환한 미소를 띤 아이의 얼굴처럼 저도 환해집니다.

두달 동안 꼬박 비를 뿌린 지난해 참 하늘이 모질다 생각했었습니다. 근데 그것이 별게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던 한해였습니다. 이른 봄 냉해를 입고 꽃이 지고 열매가 맺히니 우박이 할퀴고 태워버릴 듯한 가뭄이 찾아왔습니다. 그리고 휘몰아친 연이은 태풍은 모든 것을 망가뜨리는 줄 알았습니다.

한동안 숨 죽이며 망가진 사과밭을 정리했습니다. 태풍이 쓸고 간 뒤의 사과밭은 그야말로 전쟁터의 모습이었습니다. 그래도 시간이 흐르고 나니 남아 있는 사과들은 풍요로운 가을을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아무리 험해도 하늘은 먹고 살 만큼은 남겨두는 법이여~"라고 말씀해주시던 이웃 어르신의 희미했던 표정이 짙어집니다.

어느덧 슬슬 한해를 거둬들이고 마무리를 준비하는 시간이 되어간다는 것을 느낍니다. 혹독했던 만큼 더 기다려지는 그때엔 웃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아들 녀석이 사과밭에 털썩 주저앉아 노는 것도 꽤 오랜만입니다. 나뭇가지를 주워 들기도 하고 풀을 잘라 꼼지락꼼지락 거립니다.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궁금하여 눈높이를 맞춰 봅니다. 풀일까, 흙일까, 벌레가 지나가는 것일까.

가을이 익어가는 계절, 사과밭엔 새로운 풀이 자라고 꽃이 피어 있습니다. 클로버는 여전히 행운을 잡아보라고 합니다. 봄에 꽃반지를 만들어 주었던 기억이 났는지 아이는 작은 손가락을 불쑥 내밉니다.

풀 속에 묻혀있어 미처 줍지 못한 사과가 풀을 깎고 나니 미안한 듯한 표정으로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마지막 예초 작업이었으면 좋겠다 생각하고 며칠 전 풀을 깎았지만 아무래도 반짝이는 반사필름을 깔아주려면 한번 더 깎아야 할 것 같습니다. 세찬 바람에 꺾어 노랗게 말라가는 나뭇잎이 어찌나 많던지 아무것도 모르는 이는 "벌써 단풍이 드나봐요"라는 말을 던지고 지나갔습니다.

떨어지지 않았다고 아픔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얼마 전 매달려 있는 홍로사과를 수확해보니 25%는 흠집이 있는 사과였습니다. 후지사과도 그만큼의 흠집은 예상해야 할 것 같습니다.

누가 기특한 걸까요? 떨어지지 않고 버텨준 사과일까요? 그 사과에게 입을 맞추는 준하일까요? 개구쟁이가 가만둘 리 없습니다. 사과에게 펀치를 날리며 "펀치! 아빠 나 힘 세지?" "안돼! 사과 떨어져" 혼자 마구 사과밭을 뛰어다니는 아들에게 풀 속에서 뱀 나온다고 했더니 나뭇가지를 집어 들고 뱀이 나오면 때려줄 거랍니다. 이런 녀석을 바라보고 있으면 웃음이 절로 나지요.

거센 바람에 이리저리 부딪혀 상처가 난 사과 한 알을 따서 준하랑 맛을 보았습니다. 아직 더 익어야 하는 풋사과지만 그 맛은 제법입니다. 역시 사과는 뭐니뭐니 해도 제일 늦게 수확하는 후지 사과가 최고입니다. http://blog.naver.com/thdgk04

저작권자 © 중부매일 - 충청권 대표 뉴스 플랫폼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