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을 열며] 정문섭 논설위원

지난 9월 27일 경북 구미에서 발생한 불산(불화수소산) 가스 유출사고로 인해 온 나라가 떠들썩하다.

초기에 구미사고는 저장고로 불산을 옮기는 과정에서 작업자의 실수로 12t 가량의 불산이 누출되면서 근로자 등 다섯 명이 사망한 정도 수준으로만 보도됐다.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이번 불산가스 누출 피해는 상상을 초월하는 대형사고였음이 속속 드러나고 있다.

더욱 화가 나는 것은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해야 할 정부가 사건 초등 단계에서 제대로 대응하지 못해 피해를 눈덩이처럼 키웠다는 사실이다.

경기도에서 환경관련 벤처기업을 한다는 한 사업가는 충분히 신뢰받을 만한 측정장비와 노하우 기술력이 있어서 정밀측정 자원봉사를 하겠다고 구미시청에 문의를 했는데도 '국가기관에서 나온다.'는 말로 거부를 당했고, 이 과정에서 "주민들이 괜히 건강검진을 받고 난리법석을 떤다."는 이야기까지 들었다고 인터넷에 글을 올렸다.

'경북 구미 불산 누출 사고' 직후 환경부 국립환경과학원은 7차례에 걸쳐 중화제인 '소석회' 살포를 요청했지만 구미시 등은 이를 묵살했다고 한다.

초기 대응이 미숙했음을 보여주는 단초들이다.

정부합동조사단이 3일간 조사를 벌인 결과 불산 가스 유출사고의 피해규모는 엄청났다.

농작물 피해는 212ha에 달했고, 가축 3천200여 마리와 차량도 540여대나 파손됐다. 병원진료를 받은 주민과 근로자도 3천여 명이 넘었다.

사태의 심각성을 느낀 정부는 지난 8일 경북 구미의 불산누출 사고에 관한 관련 부서 합동 대책회의를 열고 중앙재난합동조사단의 현지 조사를 토대로 구미 봉산리 일대를 특별재난지역으로 지정했다.

불산의 성분이 인체에 들어오면 사람의 뼈를 녹인다고 한다. 불산은 사고지점에서 6.5km에 있는 나무도 누렇게 말려 죽였다. 소들이 기침하는 증상도 나타났다.

주민들은 지금 불안과 공포에 떨고 있다. 산동면 봉산리 일대에는 새와 쥐들의 시체가 널려있고, 청설모도 사라졌을 정도로 죽음의 마을로 변했다고 언론은 현지의 분위기를 전했다.

가뜩이나 구미공단은 불황의 늪에서 헤어나지 못해 폐업과 실직사태가 속출하고 있는 상태다.

분노한 주민들이 정부를 상대로 집단소송에 나서고, 생존을 위해 집단이주를 결정하면서 마을은 순식간에 폐허지로 변했다.

국민이 정부를 못 믿는다는 것은 정부가 제 역할을 다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불산의 성분은 후쿠시마의 원전사고를 떠올릴 정도로 방사능과 거의 동급의 맹독성 물질로 분류된다. 전문가들은 히틀러가 유대인을 학살할 당시 사용한 독가스 못지않을 정도로 불산의 폐해는 심각하다고 전한다.

그런 맹독성 가스들이 지금 국내 산업단지를 비롯하여 도처에 깔려 있다고 한다.

그런데도 이런 위험물질에 대한 정부의 지도 관리와 예방 및 대응책은 허술하기 짝이 없다. 이번에 9개 부처 관계자들로 구성된 정부합동조사단도 2·3차 피해가 휩쓸고 간 뒤에 부랴부랴 꾸려졌다. 장비도 간이검사 장비를 쓰다가 뒤늦게 정밀측정기를 동원했다는 소리도 들린다.

이런 식으로 초기대응을 한다면 앞으로도 수천 명, 아니 그 이상의 인명피해 사고가 터지지 말라는 법도 없다.

사전적 의미의 국가는 '일정한 영토와 그곳에 사는 국민으로 이루어져 통치권에 따라 존립되는 사회집단'을 의미한다.

국가는 인류의 역사만큼이나 오래된 역사를 가지고 있다. 국가는 예나 지금이나 변할 수 없는 절체절명의 사명이 있다. 바로 이 땅에 사는 국민의 재산과 생명을 보호하는 일이다.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하지 못한다면 국가는 존재해야 할 이유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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