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북의 무형문화재 이야기 <9> 오티별신제와 충청도 앉은굿

한국의 굿은 두 가지로 분류되는데, 서서 하는 선굿과 앉아서 하는 앉은굿이 그것이다. 선굿은 춤을 추며 노래를 불러 무가(巫歌)라 부르고 앉은굿은 무속 경전을 읽는다 하여 무경(巫經)이라 부른다.

많은 사람들이 굿이라고 하면 무가를 떠올리는데 충청도에 뿌리를 두고 있는 것은 무경이다. 이번 기획에서는 충북에 현존하는 유일한 서낭 별신제인 제천 오티별신제과 충청도 앉은굿을 소개한다.

고대부터 우리사회를 지배해온 종교는 무(巫)였다. 민간신앙이라고 하면 무속을 떠올릴 만큼 굿판을 벌이는 일도 일반적이었다.

다양한 종교가 유입된 오늘날에도 무속신앙은 전통 풍습으로 인식될 만큼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생활양식이 변화하면서 의식을 행하는 사람들이 줄어들고는 있지만 마을의 안녕과 집안의 평안을 위해 제(祭)를 올리거나 마을신에게 기원을 올리는 굿은 지금도 여전히 행해지고 있다.

▲ 동제(洞祭)의 한 유형인 오티별신제는 마을의 안녕을 비는 대동제로서 오티마을 사람들은 별신제를 통해 더불어 사는 삶의 지혜를 실천하고 있다.


현존 충북 유일 서낭 별신제

■ 제천 오티별신제

제천시 수산면 오티리에서도 마을신을 모신다. 오티리는 수산면 소재지에서 청풍과 제천방면으로 1㎞ 정도 떨어진 마을인데 원래는 청풍군 원남면에 속했다가 1914년 행정구역이 통폐합되면서 수산면에 편입됐다. 오티리는 제천 수산면에서도 제법 큰 마을에 해당된다. 다섯개의 자연부락으로 이루어진 전형적인 농촌마을로 1970년대까지만 해도 140여가구가 살았으나 지금은 108호에 200명 정도의 마을 주민이 생활하고 있다.

다섯개의 고개가 있다고 해서 오치(五峙), 오현(五峴), 의티(衣峙) 등으로 불렸는데 다섯 고개는 충주로 가는 서쪽의 봉화재, 제천으로 가는 북쪽의 한우물재, 청풍으로 향하는 동쪽의 흰뜯재와 구실재, 덕산으로 가는 남쪽의 말구리재를 말한다.

다섯재에는 각각 서낭당이 있어서 해마다 서낭제를 지낸다. 특별히 2년에 한 번씩은 안말과 바깥말, 매차골, 한질가, 청풍나드리 5개 마을에서 오티별신제를 지내고 있다.

동제(洞祭)의 한 유형인 오티별신제는 마을의 안녕을 비는 대동제로서, 오티마을 사람들은 별신제를 통해 더불어 사는 삶의 지혜를 실천하고 있다. 놀라운 사실은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을 거쳐 오늘에 이르기까지 오티별신제가 중단된 적이 없다는 것이다.

▲ 오티별신제-산신제



오티별신제는 충북에 현존하는 유일한 서낭 별신제 라는데 의의가 있다. 마을 주변 고개에 다섯개의 신당이 있어서 지금은 격년으로 별신제를 지내고 있다. 정월 14일 밤에 별신제를, 15일에 산신제를 지내는데 다섯고개에 있는 상당(上堂)과 하당(下堂)에서 서낭제를 지내고 마을 본당(本堂)에서 제의(祭儀)를 마친다.

오티별신제의 제의 순서는 이렇다. 정월 6일이 되면 총회를 열어 제주(祭主)를 뽑고 다음 날인 7일부터 모든 마을 사람이 근신에 들어간다. 제의과정을 주관하는 제주는 생기복덕(生氣福德)에 맞는 사람으로 정하고, 마을에 상(喪)이 있어도 장례를 미루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제관일행은 특히 조심하는 것이 많았는데 금주(禁酒), 금연(禁煙), 금색(禁色)을 하며 부정을 막았다. 산신제는 제관들이 살아있는 수퇘지 한 마리를 산신당으로 몰고 가 현장에서 잡아 등에 칼을 꽂아놓고 새옹을 지어 삼색 과일을 차려놓고 지냈는데 이때 쓰는 조라술은 고양주가 며칠 전 미리 산신당에 올라가 담근 것을 사용했다.

고양주를 담그는 시기에 대해서는 여러 의견이 있다. 보존회 김규칠 회장은 3일 전, 이창식 세명대 교수는 12일부터 제 올릴 준비를 했다고 기록하고 있으며 김영진 전 청주대 교수는 10일 전에 빚었다고 기록했다.

▲ 오티별신제 보존회 김규칠 회장


오티별신제의 백미는 뒤풀이 농악과 허재비놀이에 있다. 모든 제의가 끝나면 제의수행자들과 마을주민, 농악패는 모두가 한데 어울려 무동놀이를 하며 뒤풀이를 즐겼다. 오티마을의 농악은 다른 지역에 비해 쇠가락이 세고 칠채를 치는 것이 특징이다.

오티마을에서는 제의 이외에도 제액초복(除厄招福)을 위해 허재비놀이를 한다. 제액과 잡귀를 내쫓고 마을을 정화하는 주술적 의미를 담고 있다. 허재비는 남녀 각각 한 쌍씩을 만드는데 그 모습이 비교적 구체적이어서 손가락과 발가락 모양까지 흉내 내고 얼굴에는 한지를 붙여 눈·코·입을 그려 넣는다.

남자 허재비는 커다란 성기를 만들어 앞으로 튀어나오게 했고, 여자 허재비는 가슴에 돌멩이나 짚을 넣고 치마저고리를 만들어 입혔다. 여기에 수수팥떡을 꽂아 만든 화살과 바가지, 제액을 잘라 낼 칼과 몽둥이를 준비하면 신명꾼 2명이 나와 춤을 춘다.

놀이는 역동적이었으며 또한 질탕했다. 제관의 사설에 맞춰 서로 어르기도 하고 싸움을 시키기도 하며 모의 성행위를 하거나 매질을 하기도 했다. 제관은 사설을 읊으며 허재비가 마을의 액운을 가져가 주길 기원했다. 이 과정에서 허재비를 바닥에 내리치거나 술과 수수팥떡을 집어던지기도 하고 술잔을 엎어버리고 바가지에 담긴 술을 칼로 젓기도 한다.

사설이 끝나면 농악을 멈추어 바가지의 술을 허재비에게 뿌리는데 이는 액운을 가지고 멀리 가버리라는 의미이다. 이때 신명꾼은 허재비를 마을 바깥쪽으로 가져다놓고 칼끝이 마을 바깥쪽으로 나갈 때까지 집어던진다. 마지막으로 바가지를 땅에 엎어놓고 칼날이 허재비를 향하도록 땅에 꽂은 후 침을 뱉고 수수팥떡을 올려놓았던 나무판을 힘껏 밟음으로써 마을의 제액을 소멸한다.

격년제로 지내는 오티별신제에도 대고사와 소고사가 있어서 해마다 제는 올리지만 대고사에서만 허재비놀이를 하고 소를 잡는다. 오티별신제는 지난 2001년 충청북도 무형문화재 제8호로 지정됐다. 4년간 오티별신제 보존회를 중심으로 활동을 해오다 2004년 충북민속예술제에서 단체 대상을 수상하고 이듬해 2005년 전수관이 준공되면서 안정적인 전승 기틀을 마련했다.

▲ 오티별신제-상당제


2010년 4월 무형문화재 지정

■ 충청도 앉은굿

충청북도는 지난 2010년 4월 '충청도 앉은굿' 예능보유자로 무속인 신명호씨(63)를 지정했다. 쉽지 않은 일이었다. 무속을 종교적 의례라고 생각하는 상황에서 무속인을 무형문화재로 지정하는 것은 전통문화에 대한 이해가 뒷받침되어야 했다. 지난한 설득 과정이 필요했을 것이다.

하지만 충북에서 무형문화재 지정이 늦어지는 사이 정작 '앉은굿' 메카이면서 전승지인 충북은 '충청도 앉은굿'의 명성을 대전과 충남에 내어주게 된다. 1994년에 이미 신석봉씨(75·승려출신 강신무)가 충청남도무형문화재 '충청도 앉은굿' 예능보유자로 지정됐다.

이후에도 충남 태안, 전북에서 잇따라 앉은굿을 무형문화재로 지정했다. 충북의 무형문화재 지정은 늦은 감이 있지만 늦게라도 무형문화재의 결실을 맺은 것은 다행스러운 일이다.

▲ 충청도 앉은굿 예능보유자 신명호씨
30년 넘게 법사로 활동해온 '충청도 앉은굿' 예능보유자 신명호씨는 충북 청원이 고향이다. 무속에서는 흔히 신이 들려 무당이 되었는지, 집안 대물림인지를 두고 강신무(降神巫) 혹은 세습무(世襲巫)로 나뉘는데 그는 강신과 관계없이 학습을 받아 무속에 입문한 학습무(學習巫)다. 춤을 추고 노래를 부르는 선굿과 달리 굿 전체가 담담하고 점잖기까지 해서 '양반 굿'으로 불리고 있다.

신명호씨는 19세 때 갑자기 오른쪽 다리를 못 쓰게 된 것이 무속인의 길로 접어든 계기였다고 말한다. 양방과 한방을 동원했으나 치료가 되지 않자 경을 읽어보라는 주변의 권유에 따라 입산 치병을 하게 된다.

그는 청원군 가덕면의 백족산 미륵사 위 베틀바위 암굴에서 일주일 동안 기도한 끝에 병을 치료할 수 있었다. 매일 아침 정화수를 떠 놓고 멥밥을 지어 올렸다가 그것을 내려먹었다. 병은 떨어졌지만 두해가 지난 21세 때에 맹장수술 후유증이 심해지면서 3차 수술까지 받는 고통을 겪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때 앓았던 병이 무병이지 않았나 싶다. 많은 무속인들이 무병을 앓고 무속인의 길을 걷는 경우가 많았다. 신씨의 경우 강신무가 아닌 학습무지만 돌아보면 그런 생각이 들더라는 것이다. 강신은 무당이 신과 인간의 중개자 역할을 하고 청신은 경객이 신을 부리는 조정자 역할을 수행하는 것이니 법사들과 선굿 무당들과는 신을 맞아들이는 영신(迎神) 자체가 다르다.

민속학자 안상경은 그의 책 <앉은굿 무경>(민속원)에서 무경을 이렇게 정의한다. '무경은 가신(家神)이나 조상(祖上) 등을 설득해 인간의 기원을 성취하거나 신장(神將)이나 신병(神兵)을 위압적으로 명령해 악신을 제거하는 주술적 언어이다.'

경을 읽는 사람은 경객(經客) 혹은 법사라고 부르는데 이들은 병굿에서부터 망자를 천도하는 지노귀, 경우에 따라서는 마을굿까지 주재해 왔다. 집안의 안녕을 기원하는 안택굿도 했으니 경객의 역할은 매우 다양했다.

구병계열(救病系列)로는 병굿과 푸닥거리를, 기복계열(祈福系列)에서는 안택굿과 고사, 삼신굿, 용왕굿, 삼재풀이, 살풀이 등을 주재했다. 전통문화에서 가장 일반적으로 많이 하던 것은 안택굿이었는데 사람들은 으레 집안 곳곳에 가신(家神)이 머물고 있다고 생각했다.

▲ 오티별신제-허재비놀이


어린시절 기자의 할머니도 조왕신과 터주신을 모셨던 기억이 있다. 보통 안방이나 마루에는 성주(成造), 조상(祖上), 삼신(三神)을 모시고, 부엌에는 조왕, 뒤뜰에는 터주와 칠성을 모셨는데 안택굿은 바로 가신으로부터의 보호와 축복을 위한 굿이었다.

하지만 애니미즘적인 정령신앙은 아파트 문화의 발달로 도시에서 점점 설자리를 잃고 있다. 집 안에서 하는 안택굿도 더 이상 집에서 할 수 없게 된 것이 단적인 예다. 마음 놓고 굿을 할 수 없으니 굿을 하는 사람들도 점점 줄어들고 있다.

굿을 할 때 경객은 두루마기 한복과 한지로 접은 고깔을 쓰고 북과 꽹과리를 앞에 놓고 앉아서 경을 하는데 기본이 되는 화술이나 굿을 배우려는 사람이 없으니 세월이 지날수록 점점 애석할 뿐이다.

신명호씨는 '충청도 앉은굿'이 무형문화재로 지정된 만큼 후계자를 육성해 보존활동이 활발하게 이뤄지길 기대한다고 말했다. / 김정미

※자료협조 : 충청북도문화재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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