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방선거 앞두고 본도정 반세기

지방선거의 계절이 다가오고 있다. 싫든 좋든 우리는 민선 2기에 이어 내년 상반기에는 제 3기를 출범시켜야 한다.
 충북도는 지금까지 30명의 도백을 배출했다. 여기에는 민선이 3명, 관선이 27명이 포함되어 있다. 이들의 족적을 쫓다보면 도정(道政)의 반면교사를 만날 수 있다.
 역대 충북지사의 업무 스타일과 그에 따른 명과 암을 속기로 짚어 본다.
 80년대 이전은 이승우(충북도 전 기획관리실장) 씨로부터, 그 이후는 전.현직 도청 직원들의 구술을 들었음을 밝혀둔다. <편집자>
 
 ◆ 해방~50년대
 초대 윤하영 지사는 몇 안되는 장작과 쌀 가마니 취득사건으로 구속, 초대지사와 재임중 첫 수감이라는 영욕을 함께 누렸다.
 그는 전문직, 기술직 행정를 분리하는 등 미국식 인사를 처음으로 도입했다.
 2대 이광, 3대 이명구, 4대 정현모 지사는 6.25 와중이라 큰 족적을 남기지는 못했다.
 도정의 큰 족적은 5대 때부터 나타난다.
 5대 정낙훈 지사는 재임시 「현대판 신농」이라는 소리를 들었다. 빈농의 아들이었던 만큼 그는 농정에 큰 관심을 가졌다.
 그는 충주 비료공장을 유치했고, 산림녹화와 양잠에도 큰 업적을 남겼다.
 6대 김학응 지사는 역대 도백중 가장 큰 용단을 내린 인물로 기억되고 있다. 그는 직원들의 강력한 반대를 무릅쓰고 개신동 임업시험장과 농도원, 그리고 복대동 종축장 부지 등 도땅 30만평을 충북대에 무상 양여했다.
 물론 이 땅은 오늘의 충북대를 있게 했다.
 도청 주변에서는 5, 6대 지사 시절을 가르켜 「조선조의 영.정조 시대」로 비유하고 있다.
 7대 정인택 지사는 한 마디로 비운의 지사였다. 그는 3.15 부정선거의 책임을 지고 재임중 구속된 두번째 지사가 됐다. 그러나 그는 3.15 선거를 앞두고 「이렇게 엄청난 부정이 저지러지니 나라가 온전할리 없지」라고 말했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그는 출소후 부하 직원의 사랑채에서 요양을 하는 등 불운한 말년을 보냈다. 그의 도정 슬로건은 아이러니하게도 「행화촌」 건설이었다.
 
 ◆ 60년대
 9, 10대 조대연 지사는 관선과 민선을 연이어 역임한 최초 도백이었다. 또 그는 72세 때 부임한 역대 최고령 지사이기도 했다. 그는 고령 때문에 자신의 차남이자 약사 출신인 성택씨를 비서실장으로 발탁하기도 했다.
 11대 고광도 지사는 1백64㎝ 단구를 지닌 군인이었다. 이때 그의 나이 37세로 도청에도 5.16 혁명 바람이 불어왔던 것이다.
 그는 농업을 무척 중시해 당시 양정과 가공계장을 괴산군수로 전격 발탁하기도 했다. 반면 도청 청소 상태를 점검하는 등 매주 한번 내무사열을 하기도 했다.
 12대 최세인 도지사는 역대 최연소 도백이라는 기록을 아직도 갖고 있다. 부임당시 그의 나이 36세인 「청년」도지사」였다.
 그는 철저한 현장확인 행정가로 이름이 높았다. 그가 이임할 때에는 도내 1백5개 읍면을 거의 다 밟아볼 정도였다.
 그는 막걸리를 무척 좋아했으나 군인답게 공짜술은 싫어해 『돈있는 의사들이 사주는 술이 가장 맛있다』는 말을 남기기도 했다.
 14대 김효영 지사는 도정에 처음으로 기획과 경영기법을 처음으로 도입했다. 그는 법률학자 출신으로 기획조정관 제도를 신설했다.
 15대 정해식 지사는 전직 군의관이었다. 그는 박정희 사령관의 의무참모를 하다 내무부 지방국장 등을 거쳐 도백으로 전격 발탁됐다. 그는 처음에는 행정에 둔감했으나 후반에는 매우 유능한 관료생활을 한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70년대
 17대 오용운 지사는 한 마디로 노력하는 행정가였다. 그는 사병출신 장군경력 때문에 항상 못배운 것에 대한 컴플랙스를 지니고 있었다.
 그가 지프차에 영어책을 지니고 다닌 것은 지금도 회자되고 있다. 그는 합목적인 지시는 해도 부당한 지시는 자기 선에서 처리했던 것으로 후배들이 평가하고 있다.
 18대 정종택 지사는 빠른 두뇌 회전과는 별개로 가장 근면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도청 직원들에 따르면 그는 새벽 5시쯤 일어나 자전거에 빗자루를 매달고 청주 골목을 누볐다. 새마을 운동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는 모든 일은 노트에 메모를 하는 등 직접 챙겨 참모들이 적지않은 고생을 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 80년대
 20대 임성재 지사는 원칙을 지키면서도 풍류를 알았던 도백으로 기억되고 있다. 그는 대전고-서울대법대-고등고시-내무부 사무관을 거친 전형적인 행정 엘리트였으나 청렴만큼은 흔들리지 않았다.
 그는 애주가를 넘어 「새벽술」 대주가였으나 아침 8시에는 정확히 도청에 출근한 것으로 기억되고 있다.
 24대 김덕영 지사는 고시 동기생중 가장 빨리 출세가도를 달린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그가 중원군수에 부임했을 때는 그의 나이 30대 후반이었다.
 여기에는 김치열 전 장관의 손아래 처남이기 때문에 가능했다는 얘기도 전해지고 있다.
 ◆90년대~현재
 26대 주병덕 지사는 지금도 「뚝심의 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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