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20세기를 말하다 <74> 1980년대 버마 '비욘드 랭군' (존 부어맨, 1995)

영국의 아시아 식민지 경영의 거점이었던 버마는 1948년 1월 버마 연방으로 독립했지만 독립영웅이었던 아웅산 피살에 따른 정치적 구심 부재로 정파간 혼란이 야기됐다. 1962년 3월 네윈 장군의 쿠데타로 군정이 시작됐다. 사회주의에 불교적 가치를 접목한 버마식 사회주의를 천명한 네윈은 강력한 쇄국정책을 실시했으나 이는 국가 경제를 파탄으로 이끌었다. 승려와 학생, 노동자 등이 봉기한 1988년 8월의 전국적 항쟁은 '랭군의 봄'으로 불렸으며 이를 계기로 4월 영국서 귀국했던 아웅산의 딸 수치는 버마 정국의 핵심인물로 부상했다. 존 부어맨의 '비욘드 랭군'은 '8888혁명'으로 불리는 격동의 시간을 배경으로 한다.

"내가 무엇을 보든지, 오직 내 삶이 끝난 그 순간만 보였다." 여성의 목소리는 바닥까지 내려앉은 것처럼 들린다. '이국적인 동쪽의 감촉'의 신비가 눈앞에 펼쳐지는데도 그녀는 볼 수 없다. 능력 있는 의사,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아들의 엄마, 자상한 남편의 아내라는 삶의 평화가 일순간에 박살나던 그 죽음과도 같던 시간에 로라(파트리샤 아퀘트)의 영혼은 붙박여 있다. 동생의 삶의 감각을 회복시키기 위해 여행을 계획했던 언니 앤디(프랜시스 맥도먼드)의 안타까움도 깊어간다.

일정이 끝나가던 어느 날 밤, 닉과 대니가 피투성이로 식어있던 순간을 반복하는 악몽과 함께 로라는 깨어난다. 그리고 웅성거리는 소리에 끌려 밖으로 뛰어간다. 아웅산과 아웅산 수치의 얼굴이 그려진 피켓을 든 시위대열 속에서 로라는 놀라운 장면을 목격한다. 가녀린 몸매의 아웅산 수치가 담대한 평온의 미소로 죽음의 위협을 뚫고 차가운 총구 사이를 지나 시위자들과 합류한다. 시위대의 뜨거운 환호 때문에 지켜보던 로라의 얼굴에도 붉은 미소가 퍼진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여권을 분실한 로라는 방콕으로 급히 떠나는 일행들과 떨어져 혼자 남는다. 여권 재발급을 마치고 남는 시간을 고민하던 그녀는 비공식 가이드를 자처한 아웅 코(아웅 코)를 따라 한적한 시골 구경에 나선다. 낡아빠진 시보레에 흔들리면서 그녀는 여행 중 처음으로 완벽한 자유를 즐기지만, 군부정권에 의해 금지된 랭군 밖으로의 여행이 그녀의 삶을 돌이킬 수 없는 곳으로 이끌 것임을 알지 못한다.

낯설지만 왠지 모를 신뢰를 주던 아웅 코가 보여준 것은 여행 프로그램 너머의 버마, 실재하는 버마의 속살이었다. 1974년 학생민주주의 운동 조직 결성과 관련해서 2년간 교도소 생활을 하고 강제 퇴직된 교수 아웅 코와 그를 따르는 일군의 무리들은 35년간 계속된 네윈 독재의 실상을 일깨운다. '저항하기엔 너무 순진한' 버마인들에게 자행되는 살인과 고문은 외국인 저널리스트도, 미국도 구할 수 없으며 학생들, 교수들 그리고 아웅산 수치처럼 총 앞에 맞설 수 있는 어머니들이 구할 수 있다는 사실도 알게 된다.



존 부어맨의 '비욘드 랭군'은 백인 영웅 혹은 지식인의 눈을 통해 서구인들에게 낯선 이국의 시공간을 소개하는 영화의 전형을 따른다. 그 자신만큼이나 버마에 문외한인 관객들을 대신해 주인공인 백인 지식인 여성 로라는 '8888혁명'이 한창인 격동의 버마 역사 한복판으로 뛰어든다. 처음 아웅산 수치를 보고 "아름답다"고 감탄하던 그녀는 죽음의 위기로부터 우앙 코를 구해내고, 버마인들과 함께 밀림을 헤쳐 끝내 타이로 향하는 자유의 여정을 완수한다.

이 때문에 '비욘드 랭군'은 버마의 정치경제적 상황을 바깥/백인의 시선으로 관찰한다는 오리엔탈리즘의 혐의를 자초한다. 하지만 철저한 군부정권의 통제 속에서 세계의 시선 사각지대에 방치됐던 버마의 탈법적 인권상황과 극악한 혼란은 서구 중심적 오리엔탈리즘을 매개로 세상에 알려지게 됐다. '8888혁명'과 관련, 유혈사태 중단 및 공정하고 자유로운 선거 지원을 요청했던 아웅산 수치의 메시지와 다르지 않는 '세계 공동체를 향한 감정적 호소'를 영화는 담아낸다.



로라에게 아웅 코 일행과 함께 보낸 밤은 자신이 '해방될 수 있는 첫 번째 기회'였다. 안타까운 죽음만이 횡행하는 곳에서 오로지 죽기만을 열망하던 그녀는 맹렬히 살기 위해 싸우는 시간을 통해 다시 삶의 감각을 되찾는다. 일촉즉발의 정국상황에도 '동양의 신비'를 만끽하던 벽안의 여행객이라는 특권을 박탈당하고 난 뒤 버마인들과 함께 한 자유를 향한 투쟁 끝에 그녀는 다시 태어난다. "나는 의사입니다." 다시는 메스를 잡지 못하리라 생각했던 그녀가 수술 장갑을 끼고 부상자들에게 다가가는 모습으로 이 여정은 끝이 난다.

공산주의자로 매도당한 학생들과 수사들, 총을 버린 군인들로 북적이는 타이 국경 근처 캠프에서 카메라는 멈추지만 자막은 이어진다. 70만 명 이상이 탈출했고, 2백 만 명 넘게 밀림으로 몸을 숨겼다. 1990년 선거에서 압도적 승리를 거뒀지만 권력 양도를 거부당한 아웅산 수치는 1991년 노벨 평화상을 수상했고 군사정권에 의해 가택연금을 당했다. 버마는 1989년 미얀마 연방 공화국으로 국호가 바뀌었지만 국민적 동의 부재를 이유로 민주화세력과 세계 일부 국가들은 이를 인정하지 않고 있다. 빼앗긴 들에 봄은 아직 멀기만 하다. / 박인영·영화칼럼니스트



이 기사는 한국언론진흥재단 지원으로 게재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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