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북의 무형문화재 이야기 <10>목불조각장

남해가 고향인 소년은 네 살 때부터 사찰에서 살았다. 삼형제가 있었지만 형은 다섯 고모들 가운데 큰 고모댁에, 소년은 한국전쟁 당시 여군을 지낸 셋째고모에게 보내졌다. 고모는 범어사에서 공양주를 했는데 당시 사찰에는 나무조각을 하는 노스님이 계셨다. 스님은 마땅한 놀이터도, 동무도 없는 소년에게 나무조각을 가르쳐 주었다.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경남 하동의 진교농중학교를 입학하게 되지만 육성회비를 구하는 일이 막막했다. 학교에 양해를 구하고 부산에서 조각공예를 하며 학비를 벌었다. 중학생이었지만 동물모양이나 십이지상을 만드는 데는 그만한 기술자가 없었다. 초등학교 때 방학 숙제로 내준 만들기 상장은 그가 거의 독차지했다.

책가방에는 항상 조각칼이 들어 있었다. 어렸을 때부터 목탁을 자주 깎았는데 그런 모습을 보고 초등학교 6학년 때 선생님 한 분이 조각가가 될 것을 권했다. 소년 하명석의 꿈은 그렇게 굳어졌다.

▲ 딱딱한 나무에 혼을 불어넣어 불상을 만드는 하명석 목불조각장.


# 목불 조각에 눈을 뜨다

고등학교 때는 부산의 수원공예사에 취직해 돈을 벌었는데 어느 날 불상을 찾는 일본 바이어들을 만나게 된다. 불상을 만들어 달라는 말에 책을 구해 독학으로 만들어보기도 하고 그들이 가져온 사진을 보고 만들어주기도 했다. 집안 대대로 불심이 깊은 불자들이 많아 불상은 낯설지가 않았다. 다만 흉내만 냈을 뿐인데 그가 만든 불상은 반응이 좋았다.

불상조각을 배워야겠다고 다짐한 후 만난 사람이 청운스님이다. 스님과는 군대를 다녀온 이후 지리산 칠불암에서 재회했다. 스물한 살 때였는데 오로지 조각칼만 싸들고 암자에 들어갔다.

"내가 스승을 잘 만났어. 훌륭한 분이셨지 청운스님이라고. 그 분 밑에서 6년을 있었어. 그 어른한테 불상의 기초부터 배운 거야. 내 정말 고생 많이 했어. 괴팍스런 양반한테 배우느라고. 그때 나하고 같이 배운 사람들이 무지 많았는데 못 배기고 전부 다 빠져나갔잖아."

칠불암에서 부산으로 내려오고도 2년 동안 청년 하명석은 청운스님 곁을 떠나지 않았다. 당시 스님은 교수가 되기 위해 공부에 정진하였고 그는 열여섯 명의 아이들을 가르치며 돈을 버는 중책을 맡게 되었다.

▲ 하명석 목불조각장이 조각한 불상들.

결국 청운스님은 동국대 미대 교수가 되었다. 목불 조각장 하명석은 자신을 있게 한 바탕에는 청운스님의 가르침이 상당부분 차지하고 있다고 말했다. 스승과 헤어진 것은 부산에서 함께 공방을 운영한지 두해가 넘었을 즈음이다.

"한날 선생님에게 그랬지. 나가서 혼자 자유롭게 살고 싶습니다라고. 그랬더니 그러라고 하시는 거야. 나가도 실력이 좋으니까 괜찮을 거라고. 그래서 칼만 싸 짊어지고 열차를 탔지. 대전에서 내렸는데 택시를 타고 법주사까지 올라간 거야. 그때가 1984년 2월 4일이었어."

법주사와는 어떤 인연이 있었을까. "중학교 때 수학여행을 왔었고, 칠불암에 있을 때도 사진을 찍으러 두어 번 왔었지. 그때마다 너무 좋아서 언젠가는 속리산으로 들어와 살아야겠다는 마음을 가졌어. 뒤도 안돌아보고 속리산으로 왔지. 2년 넘게 절밥만 축내고 살았어."

속리산 자락이 품고 있는 내속리면에 작업실을 마련하고 28년이 넘는 세월 동안 목불 조각을 하며 살았다. 불상은 재료에 따라 금불, 은불, 동불, 석불, 토불, 목불 등으로 구분하는데 이 가운데서도 가장 많은 것은 단연 목불이다.

목불 조각에 쓰는 나무는 습윤(濕潤)과 건조(乾燥)에 따른 수축과 팽창을 고려해 균열이나 뒤틀림이 적은, 결이 치밀한 나무를 사용한다. 오동나무, 소나무, 전나무, 뽕나무, 은행나무, 느티나무, 살구나무, 회화나무, 수창목, 버드나무가 주로 쓰였다.

# 시대를 담고 있는 현대불상

목불 조각장 하명석의 불상에는 어떤 특징이 있을까? 그의 작품은 서울, 경기, 강원, 부산, 경남을 비롯해 속리산 법주사, 음성 가섭사, 보현암, 영동 중화사, 문의 월리사 등 충북에서도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불상에 능통한 사람은 불상의 표정과 모습만 봐도 조각한 장인을 알아본다고 하는데 이 같은 특징은 현대불상일 때 두드러진다.

▲ 하명석 목불조각장이 제작한 목불
"신라불은 당당한데 이조불은 고개를 숙이고 있는 모습이야. 누구는 신라불로 해달라, 누구는 이조불로 해달라고 하는데 답이 있어? 없어. 어려운 일이지. 그래서 알아서 해달라고 하면 현대불로 해드리는 거야. 신라불도 아니고 이조불도 아니니 작가들 마다 나름대로 현대에 맞게 자기가 표현하고 싶은 부처님을 만드는 거야. 창작이지. 세월이 지나가면 안 괜찮겠어? 작가만의 작품을 하는 것이 현대불이라면 나중에 세월이 흐르고 난 뒤에는 결국 이 시대를 대표하는 불상의 모습이 될 거 아니야."

현대불이라면 시대를 대표하는 작품이어야 하고 결국 지금의 불상은 목불 조각장의 작품에서 비롯되지 않겠냐는 얘기였다. 그래서 많은 불상조각 의뢰 가운데서도 현대불에 대한 주문이 가장 난감하다고 했다. 어떤 답이 뚜렷하게 있는 것이 아니니 나무를 재단해 작업실에 들여놓고도 느낌이 오지 않으면 작업을 하지 않았다.

"작업실에 들어갔을 때 딱 느낌이 오는 날이 있어. 그러면 그 느낌 그대로 가는 거지. 자비상은 눈 위에서 나오고 잔잔한 미소는 입 꼬리에서 나와. 그리고 위엄은 미간에서부터 코로 내려오는 선에서 나오는 것이지. 이 부분에 약간의 변화를 주는 거야. 가사주름도 과거와 달리 아주 사실적으로 표현하지. 현대불은 워낙 개성이 뚜렷해서 장이들은 누가 만든 것인지 다 알아. 모조품을 내놔도 다 알아. 얼굴에서 누구 작품인지 다 나오거든."

그는 상호(부처님 얼굴)를 표현하는 것이 지금도 가장 어렵다고 한다. 장엄하지만 잔잔한 미소를 머금고 있어야 하고 자비심까지 느껴져야 하니 목불 부처님을 조성하는 많은 장인들의 어려움이 다르지 않을 것이다.

그 역시 잘 될 때에는 하루 만에 완성하기도 하지만 느낌이 오지 않을 때는 석 달, 넉 달을 붙들고 있기도 했다. 기술이 있다고 뚝딱 끝낼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스님들마다 안목이 달라 구체적인 상호를 요구할 때는 애로사항이 많았다. 위엄과 자비는 있으나 웃지 않게 해달라거나 조금 더 웃게 해달라고 할 때는 기준이 없어 난감했다. 이런 이유로 조각을 하지 않은 경우도 적지 않았다.

"스님들이 상호를 요구할 수는 있지만 아예 맞지 않으면 나는 안 해. 맘이 안 맞아서 안 한데가 한두 군데가 아니야. 상식 밖의 것을 요구했을 때는 이기 뭐 장사치도 아니고 안하고 말지."

▲ 조각을 하면서도 그는 원칙을 중요하게 생각한다. 32보살 수인만 알아도 불교조각은 다 아는 것이라며 엄지와 중지의 마디 마디를 설명하는 모습이 진지하다.


# 불교조각의 원칙을 지키다

목불조각장 하명석(52)은 대작이 아닌 이상 은행나무를 선호한다. 소나무도 쓰고 느티나무도 쓰지만 행자목이라고 부르는 은행나무는 뿌리를 베어내도 껍질만 벗기지 않으면 매해 싹을 올릴 만큼의 좋은 목재라고 했다.

다른 나무는 완전히 건조가 되었다가도 습기를 빨아들였다가 빠지면 뒤틀리거나 균열이 있을 수 있는데 은행나무는 그런 법이 없었다. 그래서 길을 가다가도 은행나무만 보면 주인부터 찾는 버릇이 있었다. 은행나무 타령이 지나쳤던 것일까. 내속리면 이웃들과 그의 지인들은 은행나무만 봐도 곧장 연락을 취하는 습관을 갖게 되었다.

조각을 하면서도 그는 원칙을 중요하게 생각한다. 32보살 수인만 알아도 불교조각은 다 아는 것이라며 엄지와 중지의 마디 마디를 설명하는 모습이 진지하다. 어떤 문헌에도 찾아볼 수 없건만 엄지와 중지를 어긋나게 잡고 있는 수인을 보면 아쉬움이 크다. 문화재 조각회 회원으로 활동하는 그는 불상 조각에 있어서만큼은 원칙이 지켜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목불 조각에서 가장 중요한 것으로는 복장(伏藏, 불상을 만들 때 부처의 가슴 속에 봉안하는 사리나 여러 유물)을 꼽는다. 조각상의 형태를 결정하는 걷목 작업을 끝내면 불상의 속을 걷어내는데 이는 나무가 건조되면서 발생할 수 있는 갈라짐을 방지하고 복장을 넣기 위해서이다.

조각이 끝난 불상은 접착이 끝난 후 나뭇결이 잡힐 때까지 두었다가 채색작업을 하는데 개금을 할 경우에는 명주나 천으로 오배접 정도를 하고 사포로 표면을 다듬어 금분을 입힌다. 그리고 마지막 과정, 눈동자를 그려 넣는 점안식과 불변의 진리성을 부여하는 복장물을 입히는 의식을 행함으로써 불상 제작이 마무리된다.

목불 조각장이 단순한 기술자가 아니기 때문에 나무토막으로 불상 만드는 일은 혼을 담는 과정과 같다. 그가 목불 조각을 조각이 아닌 '목불 조성'이라고 말하는 이유 역시 같은 맥락으로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끝> / 김정미

※자료협조 : 충청북도문화재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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