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상준 칼럼] 논설위원·마케팅국장

꼭 5년전 이맘때쯤 충남 태안 앞바다에서 유조선이 해상크레인과 충돌해 엄청난 양의 원유가 해안가를 뒤덮었다. 바다가 생활터전인 주민들에게는 말할 수 없는 재앙이 온것이다.

그러나 그 바다는 1년여만에 정상으로 돌아왔다. 전국 각지에서 수많은 자원봉사자들이 앞다퉈 바닷가 바위와 모래사장에 스며든 기름 찌꺼기를 제거하려고 몰려왔다. 중부매일 직원들도 태안 앞바다의 작은섬에서 겨울추위에 맞서 웬종일 기름찌꺼기와 씨름했다. 해외언론들은 한국인의 이같은 모습에 감동했다.

21세기는 '자원봉사의 시대'이자 '나눔'을 실천하는 시대다. 선진국을 가늠하는 척도는 위기에 처했거나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을 아무런 댓가를 바라지 않고 함께 나누고 봉사하는 것이다. '태안사태'는 한국인의 결집력을 보여준 사례지만 돌이켜 생각하면 쉽게 차가워지는 냄비처럼 그때 뿐이다.

우리나라는 GNP 2만달러를 넘어서 선진국이 눈앞에 보이지만 적어도 '기부문화', '나눔의 문화'라는 잣대로 볼때 아직 후진국이라고 할 수 밖에 없다.

새삼스레 태안사태까지 들먹이며 봉사와 기부문화를 거론하는 것은 충북적십자사가 최근 곤혹스런 상황에 처해있기 때문이다. 적십자사는 주로 주민들의 기부로 운영된다. 정부위탁사업으로 지원받는 예산은 전체의 5%선 밖에 안된다.

하지만 주민들에게 적십자회비 고지서를 돌린다고 해서 회비가 들어오는 것은 아니다. '기부문화'를 낯설어 하는 사람들이 회비를 알아서 척척 낼 리가 없다. 행정기관이 적극적으로 협조하지 않으면 재정난을 겪고 있는 적십자사는 유명무실할 수 밖에 없다. 선진국처럼 주민들 스스로 회비를 내거나 자원봉사에 나서는것과 달리 공무원들이 회비모금에 동원되는 현실에선 충북도가 갑(甲)이고 충북적십자사는 을(乙) 이다.

이미 보도된 대로 전국공무원노조 충북지역본부는 "관행처럼 이뤄지던 적십자회비 모금에 나서지 않겠다"며 적십자사 충북지사와 이시종 지사를 기부금법 위반혐의로 고소한다는 방침을 밝혔다. 회비 모금에 협조하기는 커녕 법적으로 대응하겠다는 것이다. 적십자사 입장에선 기막힐 노릇이다. 회비를 다른 곳에 쓰는 것도 아니고 구호와 복지 등 좋은일에 쓰는데도 불구하고 이런일이 벌어진 것이다. 이같은 현상은 일차적으로 '나눔의 문화'에 대한 인식부족도 있지만 적십자사 활동이 주민정서에 깊이 스며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바바라 메출러가 쓴 '세상을 바꾸는 사랑의 열정가들'이라는 책에선 적십자사가 미국인의 삶속에 어떤 의미를 갖는가를 보여준다. 전국 990개 적십자 지부가 있는 미국은 연간 6만건 이상의 재해가 발생하는데 현장에 뛰어든 사람들의 97%가 자원봉사자라고 한다. 적십자사 활동에 열성적인 24세 이하의 젊은이들이 늘어나고 있다는 통계도 있다.

책에 등장하는 자원봉사자 마이클 스팬서는 "세상에는 도움이 필요한 사람이 너무나 많습니다. 제가 그 사람들을 전부 도와줄 수 있도록 몸이 열개쯤 됐으면 좋겠습니다. 적십자자가 일원이 된다는 것은 말로 표현 할 수 없는 기쁨을 줍니다"라고 썼다.

적십자사에 대한 미국인들의 정서를 반영하지만 우리나라는 분명히 다르다. '봉사'와 '나눔'에 대한 지역주민들의 인식도 개선돼야 하지만 적십자사 스스로 타성적으로 자치단체에 의존해오지 않았는지 자성해야 한다.

적십자활동에 대한 인식을 바꿀수 있도록 얼마나 노력했는지 의심스럽다는 얘기다. 적십자사 회장 선임과 회비 모금 때문에 충북도와 전공노에 이처럼 휘둘릴 수 있는 상황은 언제든 되풀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당장 시급한 것은 적십자사 회비가 없으면 가장 고통을 받는 것은 우리주변의 소외된 이웃이라는 점이다.

더구나 올 겨울은 동장군(冬將軍)이 일찍 찾아온다는 예보도 있다. 연말 구호와 봉사의 손길을 기다리는 이웃을 두고 이 시점에서 전공노와 적십자사가 대립하는 모습을 보이는것은 볼썽사나와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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