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20세기를 말하다 <79> 1980년대 미국 '월 스트리트' (올리버 스톤, 1987)

제2차 대전 이후 미국은 세계 경제에 대한 압도적 지배력이 약화되는 와중에서도 경제 안정과 고속 성장이 이어지는 황금기를 구가했다.

하지만 1973년 1월 달러화의 평가절하는 전후 세계 통화의 기준이었던 달러화의 신화를 무너뜨렸으며 1970년대 중반 2년 연속 마이너스 성장과 함께 높은 인플레이션과 스태그플레이션은 대공황 이후 최악의 경기 침체를 가져왔다.

적극적인 감세, 규제 완화, 민영화 등의 신자유주의적 기조를 바탕으로 미국 경제 회생에 주력한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 집권기인 1985년을 배경으로 한 올리버 스톤 감독의 '월 스트리트'(1987)는 세계 금융시장의 중심가 월 스트리트를 파고든다.

9시 30분, 검은 색 바탕의 초록색 숫자가 전쟁의 시작을 알린다. "빨리 팔아." "3만주는 그 포인트 이상 안돼요." "이런 우량주는 찾기 힘듭니다!" 전화를 붙잡고 고래고래 외치거나 부산스럽게 달려가는 사람들 사이를 카메라가 부지런히 헤집고 다닌다. 전쟁터와도 같은 북새통 속에서 버드(찰리 쉰) 또한 간절하게 '5분만'을 부르짖는다. 하지만 허망하게 끊긴 수화기만 들여다보며 맞은 오후 4시. 그렇게 또 하루의 시간이 갔다.

잭슨 스테이넘사에서 일하는 버드는 블루 스타 항공사에서 노조 조합장으로 일하는 아버지 칼(마틴 쉰)의 동료들에게 '미스터 월 스트리트'로 불린다. 전 세계 돈의 흐름을 좌지우지하는 월 스트리트에서 일하는 데 대한 부러움 반 격려 반의 애칭이지만, 현실은 시궁창일 뿐. 아버지 연봉 보다 많은 돈을 벌지만 월세, 자동차 할부금, 생활비 등을 충당하기에 뉴욕 생활은 벅차다. 하물며 대학 등록금 상환조차 못했는데 고객이 손해 본 7천 달러까지 물어내게 됐다.

그래서 더욱 버드는 야무진 꿈을 꾼다. 남 돈을 이리저리 날라 주기만 하는 '피라미'가 아니라 실제 돈을 버는 '큰 손', '진짜 부자'가 되리라. 그리고 드디어 순식간에 인생을 바꿀 수 있는 천금 같은 기회를 잡는다. 월가의 전설이자 신화인 고든 게코(마이클 더글라스)가 59일 동안 끈질기게 전화하며 퇴짜 맞았던 '인내'에다, 생일 선물로 비싼 시가를 들고 찾아 온 신출내기의 '영악한 패기'를 어여삐 보고 손을 내민 것. "손해 보는 건 질색이야. 잘만 한다면 모른 척하지 않겠어."

이후 버드는 '그들만의 세상'의 일원으로 합류한다. '이리저리 몰려다니다가 도살되는 양'의 처지에서 '1등석'을 타고 '전용기'에 오르는 사람으로의 수직 상승은 아찔하다. 이스트사이드를 내려다보는 고급 아파트, 최고급 취향을 두루 갖춘 미녀, 접근조차 불가능했던 최고급 클럽에서의 여유 있는 식사와 좋은 옷. 그리고 엄청난 물주 덕분에 비서와 함께 배정받은 개인 사무실에서 그는 인생역전의 희열을 마음껏 즐긴다.



"탐욕은 좋은 것입니다. 탐욕은 동기를 부여하고 전진하는 정신의 정수를 북돋아 활기를 줍니다. 삶, 재물, 사랑, 지식에 대한 탐욕은 인류를 윤택하게 합니다." '월 스트리트'에서 노회한 기업 사냥꾼이자 주식 시장의 투기꾼인 고든은 '선으로서의 탐욕'을 설파한다. '꿈이 현실이 될수록 더 많은 것을 원하게 되는 자본주의'라는 추악한 전쟁터에서 승리라는 유일한 목표를 향해 그는 작전 세력을 동원한 주가 조작은 물론, 내부 정보를 이용한 불·탈법을 자행한다. 적대적 인수합병 과정에서 수많은 노동자의 삶 같은 건 당연히 안중에도 없다.

이 점에서 '월 스트리트'는 젊은 주식 중개인 버드의 친아버지 칼과, 멘토이자 유사 아버지이기도 한 고든이 펼치는 가치관의 전쟁이거나 아버지들의 인정투쟁으로 정리될 수 있다. 버드는 평생 한 직장에 헌신한 허름한 행색의 아버지 대신 화려한 '1%'의 세계를 약속한 고든을 선택한다. 'Fly me to the moon' 노래가 들리면서 떠오르는 해와 함께 펼쳐지는 뉴욕 월 스트리트의 분주한 아침은 매혹적이다. 맨해튼의 마천루, 롱 아일랜드 바닷가, 고가의 미술품 등을 보여주는 카메라는 버드가 느끼는 물질적 풍요의 나른한 만족감을 실감나게 전한다.



마치 충직한 애견처럼 고든이 가리키는 먹잇감을 물어오던 버드는 블루 스타 항공사를 분리 매각하려는 고든의 의도를 알아챈 후에야 자신이 너무 멀리 왔음을 깨닫는다. 그리고 '지갑 크기로 사람의 성공을 재는 인간'이기를 거부하는 아버지 칼과 연대해 고든에게 저항한다. 자본의 합법적 투기장으로서의 주식 시장에 대한 관찰을 통해 자본주의의 추악한 맨 얼굴을 회의하는 '월 스트리트'의 비판적 태도는 특히 실제 부자 사이이기도 한 버드와 칼 역의 찰리 쉰, 마틴 쉰의 감동적 화해를 통해 분명히 제시된다.

결국 법의 심판을 받게 된 고든은 "난 만들지는 않아. 다만 소유할 뿐"이라고 일갈했었다. 반면 정보 누설과 증권거래 조작 혐의로 죄 값을 치르러 떠나는 아들에게 칼은 "쉽게 벌고 남의 것 사고 파는 것 말고 생산적인 일을 하라"고 당부한다. 그렇다면 이 영화는 아버지 칼의 승리를 선언한 것일까. '월 스트리트' 개봉 후 23년 뒤인 2010년 올리버 스톤은 '월 스트리트' 2부 격인 작품을 개봉한다. 11년 수감을 마치고 돌아온 고든의 이야기인 영화의 부제는 '머니 네버 슬립스 Money Never Sleeps'. 그 말처럼, 돈이 결코 잠들지 않는 것이라면 '월 스트리트'의 해피엔딩은 결코 해피엔딩이 되지 못한다. / 박인영·영화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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