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20세기를 말하다 <80> 1990년대 남아프리카공화국 '굿바이 만델라' (빌 어거스트, 2007)

1918년 출생한 넬슨 만델라는 1952년 변호사 자격증을 취득한 뒤 반인종차별 활동으로 1952, 56년 두 차례 체포됐다. 1961년 지하 무장조직인 움콘토 웨 시즈웨(민족의 창)를 결성, 1962년 구속돼 내란음모 혐의로 종신형을 받았다. 로벤 아일랜드섬에서 보낸 27년 6개월의 수감생활은 그를 단순한 반 아파르트헤이트 투쟁의 전사로뿐만 아니라 자유와 평화를 열망하는 전 세계 인권운동의 상징적 존재로 만들었다. 1990년 자유의 몸이 된 만델라는 1993년 드 클레르크 남아공 대통령과 함께 노벨평화상을 수상했으며, 1994년 남아프리카에서 최초로 실시된 민주 선거에서 대통령에 당선됐다. 빌 어거스트의 2007년 작품 '굿바이 만델라'의 이야기는 1968년 로벤 아일랜드섬에서 시작된다.

손과 발이 쇠사슬로 묶인 흑인 죄수들이 차량에서 내려 배에 올라탄다. 발을 삐끗하거나 조금이라도 머뭇거릴라치면 여지없이 경찰들의 구타와 채찍이 날아든다. 곧 '1968'이라는 연도가 표시되지만 어떤 기시감 때문에 보는 이의 시간감각은 헝클어진다. 마치, 그들의 모습은 몇 세기 전 유럽 혹은 신대륙으로 끌려가던 아프리카 노예의 형상을 닮지 않았는가. 아파르트헤이트가 맹위를 떨치는 때, 검은 피부의 사람들은 그렇게 과거로부터의 억압을 여전히 짊어지고 살아간다.

하지만 흰 피부를 가진 이라면 배에 오르는 발걸음은 가볍고 마음은 설렌다. 밝고 따사로운 햇살이 가득한 섬, 로벤 아일랜드 교도소로 부임하는 제임스 그레고리 준위(조셉 파인즈)는 잊지 않고 낚싯대를 챙긴다. 아름답고 알뜰한 아내 글로리아(다이앤 크루거)도 새로운 환경에 기대감이 크다. 단순 범죄자가 아니라 '테러리스트'들을 수감하는 국내 최고의 교도소. 이곳은 남편의 승진을 위한 발판이 될 수도 있으리라.

그들의 소망대로 로벤 아일랜드는 제임스에게 기회의 섬이 된다. 아프리카 흑인들의 말 코사어를 알고 있는 그는 종신형으로 낭비되는 세금조차 아까우니 만델라를 교수형 시켰어야 했다는 강성 발언으로 만델라(데니스 헤이스버트)와 ANC 동료들 감시를 맡는다. 6개월에 1회, 500단어 이하로 주고받을 수 있는 편지들을 사전 검열하고 감옥이나 정치적 상황에 관한 언급은 삭제하거나 이를 프레토리아에 직보하는 중요한 자리. 면회객과의 통화 또한 주의 깊게 경청하며 중요한 정보를 포착함으로써 그는 상부의 신뢰를 얻는다.

"그들이 뭘 생각하고 어떻게 생각하는지 알아야해. 그들에게 영혼이라는 게 있다면 자네가 그 창문 역할을 해 주게." 상관 피엣 소령의 지시는 명료했다. 그러나 진중하고도 성실한 제임스의 '창문 역할'은 예상치 못한 변화를 갖고 온다. 만델라의 아들 템비의 자동차사고가 자신이 보고한 정보를 바탕으로 위장된 살인이었을 지도 모른다는 의문과 자책은 제임스로 하여금 아버지 만델라의 슬픔에 공감케 만든다. 이 작은 연민을 시작으로 그는 '더 나은 세상과 국민과 가족을 위한' 만델라의 싸움에 대해 비로소 눈을 뜬다.



2003년 암으로 사망한 제임스 그레고리의 책 '굿바이 바파나: 넬슨 만델라, 나의 죄수, 나의 친구'를 영화화한 '굿바이 만델라'는 아무래도 넬슨 만델라의 삶을 복기하기에는 아쉬움이 있다. 1994년 대통령 취임식에 초청됐던 제임스의 실제 행적에 대한 비판적 이견은 차치하고라도, 백인의 시선으로 진행되는 영화는 만델라 자체보다는 그로부터 영향 받은 백인 남성과 그 주변 삶의 변화에 더욱 초점이 맞춰져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바로 그 점에서 '굿바이 만델라'는 억압적인 체제가 어떠한 내면화 기제를 바탕으로 유지 및 강화·확산되는가에 대한 좋은 연구사례가 된다. 제임스의 어린 딸 마르타는 시장에서 흑인들이 남녀 불문하고 구타당한 뒤 붙잡혀가는 장면을 보고 우울한 낯으로 묻는다. "왜 경찰을 안 말렸어요?" "그게 공평한 거예요, 아빠?" '백인은 이쪽에 흑인은 저쪽에' 사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는 엄마의 설명에도 마르타는 계속 슬픈 표정이다.



분명 어린 시절 글로리아도 마르타와 같았을 것이다. 하지만 공평하고 평화롭게 사는 세상을 열망하며 동등한 권리를 제창한 ANC의 '자유선언문'을 금서로 묶어놓고, '백인들 멸종시키자는 공산주의자'로 왜곡하는 교육과 언론의 집중 포화 속에서 그녀 또한 다른 많은 이들처럼 진실로부터 멀어져갔을 것이다. 게다가 남편 월급과 자신의 부업으로는 애들 학교 갈 신발도 살 수 없는 열악한 삶 속에서 교도소 일자리와 승진에 목맬 수밖에 없는 소시민의 현실은 실체도 없는 흑인 테러리스트들에 대한 적대와 증오를 강화하는 토양이 된다.

'굿바이 만델라'는 아파르트헤이트의 엄혹한 시간에 맞선 흑백의 인간적 연대로 해피엔딩을 맞는다. 자신과 가족에게 가해지는 주변의 위협에도 굴하지 않고 거짓으로부터 진실의 세상으로 이동해 간 제임스는 숱한 회유에도 소신을 꺾지 않은 만델라의 수감생활을 함께 한다. 폭동과 폭탄, 자살과 지뢰 얘기뿐인 남아프리카에서 자라날 아이들의 미래를 걱정하는 '만델라의 친구'가 된 그는 1990년 2월 11일, '전 세계가 기다려 온 바로 그 순간'을 텔레비전으로 보면서 작별인사를 한다. 흰 눈 소복이 내린 만델라의 머리처럼 그의 얼굴에도 자잘한 주름이 가득하다. / 박인영·영화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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