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칼럼] 변광섭 청주시문화산업재단 문화예술부장

버스는 좀처럼 오지 않았다. 해는 저물고 칼바람과 함께 사륵사륵 눈이 쌓여만 갔다. 눈 내리는 날이면 아이들은 수다를 떨며 눈사람을 만들고 눈싸움을 하면서 살갗 부르트는 성장통을 겪지만, 시인은 하얗게 젖은 내면의 피를 토하며 시를 쓴다.

그래서 김광균의 눈은 여인의 옷 벗는 소리로 내리고, 백석은 쌀랑쌀랑 푹푹 내리며, 기형도는 눈물처럼 내린다고 했다. 고은은 삶과 죽음의 경계를 하얗게 덮으면서 내리고, 최승호는 다투어 몰려오는 힘찬 눈보라의 군단이라고 하지 않았던가.

사람들의 발걸음은 눈길에 미끄러질까 머리와 허리를 납작 엎드린 채 아기걸음이고, 차들도 제 속도를 내지 못하며 앞 차 꽁무니만 쫓고 있었다. 근 한 시간은 기다린 것 같다. 오랜만에 타보는 버스 안은 사람들의 온기로 후끈 달아오르고 있었다. 북풍한설의 바깥풍경과는 달리 버스 안은 어머니의 자궁 속처럼 포근했다. 그 속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꼬물꼬물거리며 숨 찬 하루를 마감하고 있었다.

물론 사람들의 표정도 각양각색이다. 몇은 그믐처럼 졸고 있고, 몇은 핸드폰에 눈알 빠질 것 같고, 몇은 감기에 콜록이고, 몇은 수다 떨며 저물어 가는 시간을 삼키고 있었다. 나는 눈길에 밀려 정차시간을 놓친 운전사의 짜증섞인 말투에서부터 졸거나 떠들거나 통화중이거나 시심에 젖어있거나 한 버스 안의 사람들 풍경속으로 비집고 들어가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각다분한 삶에 지쳐있는 표정들, 그렇지만 살아야 하는 의무감이나 희망이라는 꿈을 빚고 있는 저 많은 꽃무덤 속에서 나라는 놈도 이 많은 무리와 생명과 꽃 중의 하나일 뿐이라는 생각을 했다. 아름다우면서도 서럽고, 힘들면서도 따뜻한 사람들의 풍경과 그 사람들의 냄새와 그들의 꿈을 생각했다. 울컥 눈물이라도 쏟아질 것 같다. 여기까지 왔는데 더 잃을 것이 있을까. 무엇을 더 바라는가. 저들과 함께 노래하고 춤을 추며 멋지게 한 세상 살다가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시인 김종길은 '성탄제'에서 "눈 속에 따 오신 산수유 붉은 알알이, 아직도 내 혈액 속에 녹아 흐르는 까닭일까"라며 하얀 눈과 붉은 산수유가 자신의 생을 치료할 수 있는 약(藥)이라고 했는데, 오늘 나는 버스 안에서 만난 사람들의 풍경을 내 가슴 속 깊이 흐르고 있는 혈액과 합궁하는 성스러운 시간을 가졌다. 온 몸이 바알간 숯불처럼 타 오르고 상처 깊숙이 성숙하니 지난날의 아픔과 욕망이 절로 치유되는 듯싶다.

그렇다. 새해의 화두는 성장도, 복지도, 통일도, 교육도 아니다. 바로 '우리'다. 가족이라는 우리, 직장이라는 우리, 학교라는 우리, 사회라는 우리, 그리고 그 속에서 사랑의 마음을 키우고 상처의 아픔을 치유하는 '우리' 말이다. 그간의 삶을 되돌아보면 기쁨과 영광보다는 슬픔과 외로움과 적요가 나를 더 힘들게 하고 비명지르게 한 것 같다. 나만의 욕망에 젖어 있었기 때문이고, 나만의 꿈을 빚으려 했기 때문이다. 나무도 혼자 있으면 외롭거늘, 제 아무리 아름다운 꽃이라도 혼자 피면 눈물겹도록 쓸쓸하거늘 이제부터는 '나'가 아닌 '우리'라는 따뜻한 보금자리를 만들어보자. 그 속에서 나의 불우함을 달래고, 우리 사회의 불확실성과 이념과 비이성의 참혹함을 달래면 좋겠다. 생각이 다르다고, 이념이 다르다고, 하는 일이 다르다고, 가진 것이 다르다고 벽을 쌓거나 등을 돌리고 돌팔매질 하는 일이 없으면 좋겠다. 바로 그 자리에 서로의 생각과 행동이 스미고, 번지고, 비치며, 퍼지고, 꽃이 피며 열매 맺는 세상이 필요하다.

해도 바뀌고 정권도 바뀌었다. 무심천을 흐르는 물살과 산성을 오가는 새들과 각다분한 도시 뒷골목의 바람도 어제의 그 모습이 아니다. 그러하니 다시 불타는 인생을, 아름답게 피어오르는 꽃대를, 알곡진 열매를 맺는 새 시대를 준비하자. 떠듬떠듬 어눌하게, 천천히 길게, 깊고 느리게, 낮고 두텁게, 그렇지만 뜨겁고 멋지고 오달진 '우리'라는 신세계를 만들어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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