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마고도에서 인생을 만나다-5. 신·인간·동물이 공존하는 사찰 '효린스'

새벽 6시30분 아침 일찍 효린스(Drango monastery gaden Rabten Namgyel Ling)로 출발하기 위해 숙소를 나섰다. 아침에 효린스를 방문하자고 해서 나왔는데 앞서 출발하신 회정스님은 보이지 않았다.

효린스가 눈앞에 바로 잡힐 것 같이 가까웠으나 카메라 가방을 둘러메고 걸어간다는 것이 이 높은 고도에서 무리가 될 것 같아 차를 타고 가기로 하고 차편을 흥정하기 시작했다.

거리로 따지며 1~2km 정도이기 때문에 1인당 많이 요구해야 10위엔 정도로 생각했는데 그들이 요구하는 요금은 500위엔. 택시도 아닌 봉고차량을 이용해 5분 정도면 갈 수 있는 거리를 관광객이라는 이유로 500위엔을 달라고 하니 기가 찰 노릇이다.

길가에는 많은 차량들이 줄지어 세워져 있었는데 그 많은 사람들중 손님과 가격을 흥정하러 다니는 사람은 단 한사람이었고, 그 생김새가 우락부락하게 생긴 것이 폭력조직원처럼 보였는데 그가 독점하고 있었다.

아마도 그가 거간꾼 노릇을 하면서 흥정하고 배차해주고 하는 것을 직업으로 하는 사람처럼 보였다. 500위엔씩 주고 차를 타고 간다는 것이 말이 안 된다고 생각하며 걷기로 했다.



효린스로 가는 도로 우측편은 포장된 도로를 잘라 공사를 하고 있는 까닭에 파헤쳐져 있어 통행하기가 불편해 큰 도로를 따라 올라갔다. 부지런한 상점주인들은 이른 아침임에도 빗자루를 들고 상점앞을 쓸고 있다. 정성을 들여 비질을 하는 그들의 얼굴에 새 아침을 여는 신선함 같은 편안함이 보인다.

한참을 땀흘려 걸어 다리를 건너니 효린스로 오르는 길이 나타났고, 높이 3m, 둘레 2~3m는 됨직한 커다란 마니차 10여개가 계단처럼 놓여있었다.

아침 일찍부터 신들과 대화하려는 믿음이 강한 사람들이 이곳을 찾아 부지런한 몸놀림으로 힘차게 마니차를 밀고 있는데 그들의 발걸음이 얼마나 빠른지 마치 뛰어가는 것 같은 속도여서 내가 쫓아가기가 힘들 정도였다. 나도 마니차를 돌려 보았다.

손끝에 마니차의 딱딱하고 차가운 금속의 기운이 스며든다. 내 소원을 이루게 해달라는 염원보다는 이곳 사람들이 행하는 의식을 쫓아 귀국하는 그날까지 아무런 사고 없이 건강하게 함께할 수 있도록 해달라고 빌어보았다.

이곳에는 개와 소가 길가에 지천이다. 오가는 사람의 숫자보다 훨씬 많은 짐승들이 길거리를 활보한다. 매어놓지도 않고 방목하는 형식으로 놓아두고 그들의 배설물이 길가에 아무렇게나 널려있어 미관상 좋지 않았지만 인간과 동물이 자연스럽게 공존하고 있다는 것이 평화스러워 보인다.

언덕에 촘촘히 지어놓은 집들 사이로 좁은 길이 나타났고 그 길을 따라 효린스에 올랐다. 산 중턱에 위치한 사원은 무척이나 조용했고 내가 올라가자 한 무리의 까마귀들이 난리다.



아침 7시25분 사원 안으로 들어갔다. 이 효린스는 동티벳 최초의 겔룩파 사원이라고 한다. 사원의 분위기는 우리나라 절과는 그 분위기가 사뭇 달랐다. 절 외부는 방치된 사찰처럼 여기저기 수리를 하거나 손을 보아야 할 곳이 많았고, 내부는 어둠과 향냄새가 너무 꽉차있어 호흡곤란증세를 느낄 지경이다.

또한 법당 앞에는 오색전구들을 6층 탑식으로 만들어 불을 밝혔고, 커다란 시루 같은 그릇에 담긴 노란 고체물에 심지를 박아 촛불을 켜두었다. 초를 굳혀놓은 것은 아닌 것 같았고 무슨 기름 같은 성분처럼 보였다. 그 자체만으로도 이 사찰의 무게가 크게 느껴졌다.

그리고 법당 안쪽 어두운 곳에는 상당히 큰 마니차가 놓여 있었다. 저 마니차도 누군가가 열심히 돌렸을 것이고 그 마니차를 돌리며 소원을 빌었던 이곳의 많은 신도들이 축복을 받았을 것이다.

사원 안 법당에서 스님 한분이 독경을 읊고 있다. 정좌를 한채 자신이 할 일만을 묵묵히 하는 스님에게 내부촬영 양해를 구하고 내부를 촬영할 수 있었다. 실내는 신단을 중심으로 그 가장자리에는 당대의 고승들을 나한들처럼 조각해 나열해 놓았다. 달라이라마를 포함한 신단의 얼굴들은 우리나라 사찰의 불상들과 달랐고, 살아있는 신 달라이라마의 사진이 모셔져 있다.

다른 무거운 얼굴을 하거나 거대하게 놓여 진 神像들에 비해 4분의 1 크기의 금박을 입힌 불상은 너무 왜소하게 놓여있었다. 쌍용이 호위를 하는 신단 속 불상 앞에서 회정스님은 경건하게 기도를 올린다. 무슨 기도를 드리시는 걸까? 그 내용이 궁금하다.



2층으로 올라가려고 나오니 1층 통로 안쪽 벽쪽으로 작은 마니차 18개가 줄지어 늘어서 있는데 그 마니차 윗부분은 사람들의 손때가 묻어 오히려 더 반짝이고 있다. 이곳에서도 신도들이 찾아와 마니차를 돌리며 그들의 소원을 빌었을 것이다.

2층은 한 번에 수십명이 앉아 기도를 올릴 수 있도록 강당이 만들어져 있었고, 천장 각 모서리에는 우리의 도깨비와 같은 형상이 조작되어 있다. 금색의 눈동자와 이글거리는 불꽃 눈썹을 지닌 도깨비는 이마에도 눈을 하나 더 달고 있었고, 모든 털은 불꽃으로 그려져 있으며, 돼지 코에 큰 입 그리고 하얀 이빨속의 혀가 두 갈래로 八字를 이루고 있다. 구석에는 커다란 징과 굉장히 크고 굵은 2개의 금관악기 같은 것이 놓여 있었는데 끈이 매어져있고 끝이 좁은 것으로 보아 의식을 행할 때 사용하는 악기처럼 보였다.

8시가 넘어서자 동쪽하늘에 해가 떠오른다. 차츰 내가 서 있는 이 효린스에도 빛살이 다가오고 있다. 아름다운 아침 햇살에 물드는 루훠의 풍경이 새삼 더 찬란한 아름다움으로 다가온다. 이제 이 루훠를 떠나야할 시간이 되어간다. 아침에 걸었던 길을 되돌아 걸을 생각을 하니 한숨이 나오기는 했지만 어차피 걸어가야 할 길이니 즐겨야할 것 같다.

시발 한 그릇과 빵으로 간단히 아침을 먹고 9시30분 숙소를 출발해 간쯔(甘孜)로 향했다. 깐즈로 가는 외곽에서 들어오는 길목에는 무장한 군인들이 경계를 서고 있었고, 일행들이 고기 등 식자재를 구입하는 동안 우리 2호차는 외곽길에 차를 세우고 대기하고 있었다. 대기하고 있는 동안에도 카메라를 꺼내 촬영조차 하지 못했다. 잘못하면 카메라를 빼앗길 수 있다는 충고를 들었기 때문에 군인들을 촬영하는 것은 삼가할 수 밖에 없었다.

10시경 주유소에서 주유를 마치고 317번 국도를 따라 출발했다. 간쯔(甘孜)까지 비포장도로의 국도를 200km를 달려가야 한다. 지금 깐즈로 향하는 317번 국도는 한창 포장준비를 하거나 포장을 하고 있는데 그 방식이 우리와는 너무나 다르다.

이곳에서는 일부 구간 중 한쪽만을 흙을 채우고 위에 아스콘을 섞은 것으로 덮고 있는데 끈기가 전혀 없는 그냥 모래에 검은 타르를 조금 섞은 것을 올려놓고 다지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다보니 국도 자체가 2차선 도로여서 한 방향으로 차가 진행하면 나머지 차량은 대기하거나 좁은 공간에서 교행해야 하고, 대형차들이 교행하기가 불가능하기 때문에 구간을 통제하는 방식으로 소통이 이루어지고 있다.

루훠에서 1시간을 달려왔는데 겨우 13km였다. 해발 3천300m에 이르러 잠시 길가에서 휴식을 취하기 위해 차를 세웠다. 미루나무 가로수들이 도로의 양 옆으로 줄지어 늘어선 풍경이 우리 어린 시절의 신작로 같다.

그때도 도로 위를 달리는 차량이 내뿜는 먼지를 마시며 그 뒤를 쫓아다녔던 기억이 있는데 지금 이곳의 현실이 70년대 우리 농촌의 모습과 너무나 같다. 푸른 하늘에는 흰 구름이 떠다니고 씽커 밭에서는 씽커가 익어가고 있다.

산자락에 예쁘게 지어진 촌락의 모습과 자전거를 타고 하이킹을 가는 청년들의 모습은 싸움을 떠나는 전사처럼 머리에는 헬멧을 쓰고, 얼굴에는 두건을 두르고 있는데 머리부터 발끝까지 먼지가 뽀얗게 뒤덮고 있다. 젊은 혈기가 부럽고 그들의 도전정신이 돗보이는 것은 그들이 이 험준하기로 소문 난 차마고도 길을 한달 이상 자전거 폐달을 밟으며 달려간다는 것이다.

오후 1시45분 우리는 루훠를 출발한지 4시간만에 60km 떨어진 고도 3천535m의 充古鄕에 도착했다. 이 充古鄕에는 카사후(잡살호라고도 함)가 있으며, 이 호수는 천장북로로 향하는 곳에 위치한 최대의 조류 서식지인 동시에 이곳 주민들에게는 성스러운 호수로 추앙받고 있는 곳이다.

키워드

#연재
저작권자 © 중부매일 - 충청권 대표 뉴스 플랫폼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